- 다시, 6급행정실장 : 스물여덟과 마흔 일곱 사이
2006년 1월 31일, 유난히 추웠던 겨울.
결혼 전, 안성탕면의 그 '안성'이 경기도의 지역 중 하나라는 것도 몰랐던 전라도 섬 출신 촌뜨기였던 나는,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3시간 반을 타고 나서야 첫 발령지에 도착했다.
지금은 상상할수도 없지만, 그땐 9급 신규 발령자를 덜컥 행정실장 자리에 앉히던 시절이었다. 임용전 고작 2주 연수를 받은 '쌩 초짜' 9급 신입이 교장 교감 선생님을 상대해야 하는 학교 행정 업무 총괄 책임자가 된 것이다. 다행히 설 연휴 직후라 학교는 겨울방학중이었고, 떨리는 교장선생님과의 대면식은 며칠 뒤에 이루어졌다.
드디어 첫 간부회의 날, 교장실로 들어가기 전 복도에서 마주친 50대 여자 교감선생님은 내 위 아래를 쓱 훑어보시더니 대뜸 내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모자 달린 내 패딩이 촌스러워 보였던 걸까, 아니면 학교장님께 첫 인사 드리기엔 격식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셨던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큰 성인에게, 딸도 아니면서 직접 옷까지 벗기다니. 불쾌하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당시 스물여덟이었던 나는 그 무례한 행동 앞에서 얼굴만 붉힌 채 서둘러 옷을 벗었다. 아버지께 늘 '어른을 공경하라' 배웠던 착한 딸이자, 분노는 동기들에게나 쏟아낼 수 있는 소심한 성격 탓이었다. '이런 성격으로 행정실장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공무원 합격 전 혹독한 사회생활 경험 덕분인지, 아니면 잘 갖추어진 업무 매뉴얼 덕분인지 나는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그리고 운 좋게 능력 있고 착한 직원들을 만난 덕에 6개월 후 시보를 뗄 무렵엔 교장선생님께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공무원의 특권인 '칼퇴근'은 일의 빠른 추진력과 박봉을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여가를 즐기기엔 현실이 팍팍했고, 주말마다 가족과 남자친구를 보러 가는 교통비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나는 2년 뒤, 7년 연애한 키다리 남자와 스물아홉에 결혼했다. 아홉수라며 서른에 하라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른이 되면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고 여자동기들의 로망인 육아휴직을 나도 조금이라도 빨리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주말부부 생활과 장거리 이동에 지쳐 아이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결혼 3개월이 지나 고향인 전라도로 교류를 신청해 새로운 환경에서 공무원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어디든 적응을 잘하니 나니까'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고 솔직히 겁도 별로 없었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결정이고 자만이었는지 교류 후 전라도에서의 공무원 삶을 시작하며 알게 되었고, 낯선 전라도 근무는 적응을 떠나 생각보다 힘들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공공기관이라기보단 시골 동네 같은 분위기, 술에 약하고 임신을 준비중이던 내게 쏟아지는 회식과 음주 강요는 고역이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동기가 없다는 '고립감'이었는데, 교육을 가도 아는 얼굴 하나 없고 업무가 막혀도 전화할 동기가 없다는게 서글펐다. 붙임성 좋은 성격이었다면 옆 학교에 전화라도 걸었을 텐데, 소심한 나는 혼자 끙끙 앓으며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배워야 했다.
그렇게 5년, 서른 다섯에 난 7급으로 승진했다.
경력이 쌓이며 업무 능력도 사회성도 늘었지만, 유독 부당한 일에는 고개를 숙이지 못했다.
문제를 덮는 대신 정면 돌파를 택했고, 학교장의 부당한 지시를 공론화하다 '찍힌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업무 갈등보다 힘든 건 행정실에서 내부 직원 간 갈등이었다.
동급 주무관과의 업무 분장 다툼, 책임 전가하는 선배와 상사로 인한 화병과 불면증, 사소한 말투 오해로 빚어진 냉전.. 같은 사무실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나에겐 너무나 크나큰 고통과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런 수많은 상처와 갈등 속에서 단단한 굳은 살을 만들며 버틴 20년,.
그 피, 땀, 눈물이 결실을 맺어 드디어 마흔 일곱, 7월 1자로 영전을 했다.
7급 승진 후 12년 반 만에 그토록 미치도록 원했던 6급 행정실장이 다시 된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의 20년 전의 어리버리한 초보 행정실장이 아니다.
물론 여전히 인간관계가 어렵고, 속은 잘 부서지는 '쿠크다스 멘탈'을 가진 리더이긴 하지만,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 20년차 공무원 행정실장으로서 앞으로 내 인생이 또 어떤 스토리가 펼쳐질지 이젠 제법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