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의금부 군사들의 발자국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밤이 깊은 적선동 거리가 다시 고요해졌다. 그때 혜신이 언국의 손을 확 뿌리치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니?”
언국은 의금부 군사들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그녀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만날 수 없었던 언국을 만난 반가움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그녀의 말투는 몹시 싸늘했다.
“흥! 저번엔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넌 나타날 때도 느닷없구나?”
“미안”
혜신의 말투는 여전히 뾰로통했다.
“아깐 왜 숨어있었어?”
“아 그 그게....”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리는 언국에게 혜신은 재차 물었다.
“넌 내가 궁금하긴 했니?”
“그럼! 그동안 잘 지냈니?”
기막히다. 이건 엎드려 절 받기 식이 아닌가?
“참! 일찍도 물어 본다. 오다가 보니 벽에 용모파기가 붙었던데?”
언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설명하려면 좀 길어”
“또 피하네? 도대체 너 정체가 뭐야? 넌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아이구나?”
휙 돌아서려는 혜신의 팔을 언국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렇게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
“이거 놓지 못해?”
혜신이 언국을 쏘아보았다. 그녀도 그가 도둑일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숨기는 게 많아 보이는 그가 썩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은 언국은 이대로 혜신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입을 떼었다.
“너 혹시 그때 내가 준 침통 가지고 있지?”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언국을 보며 말했다.
“하! 기막혀”
“내가 지금 그게 너무 필요해서 그래”
그녀와 달리 언국은 정말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 침통이 있어야 스승을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혜신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
언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혜신은 꼭 확인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너 정말 도둑이니?”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니?”
둘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그때 혜신이 갑자기 주위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보시오!! 여기 도둑이 있소!”
깜짝 놀란 언국이 다급하게 혜신의 입을 막았다.
“무슨 짓이야?”
혜신은 언국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도둑이야!”
언국은 있는 힘껏 두 손으로 혜신의 입을 틀어막고 혜신은 몸을 피하며 뿌리쳤다.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둘은 지쳐 숨을 헐떡였다. 숨을 고른 혜신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언국을 쏘아보며 말했다.
“넌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해? 믿을 만한 행동을 해야 믿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혜신은 두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 가려하자 언국은 다시 혜신의 팔을 붙잡았다.
그때 혜신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저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당황한 언국은 할 수 없이 붙잡은 혜신의 팔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몸을 숨긴 언국은 힘없이 걸어가는 혜신의 뒷모습을 보며 오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잔뜩 긴장했던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곤 까만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았다. 순간 언국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그 아이 이젠 그렇게 울진 않겠지’
한편 복잡한 마음으로 처소로 돌아온 혜신은 품에서 침통을 꺼내 경대 안에 넣었다. 여느 때 같으면 잔소리부터 늘어놓았을 강 상궁이건만 오늘은 혜신의 안색을
살피고는 입을 닫았다. 혜신은 속상함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툭 떨궜다. 그녀는 그동안 언국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었다. 사실 오늘 그녀는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 아이 얼굴을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웠다. 그런데 왜 그 아이에게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을까?
며칠 후 운종가에 나온 혜신은 자연스럽게 광통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 상궁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군말 없이 혜신을 따라 걸었다. 광통교 입구로 가자 허
름한 차림의 아이 둘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구걸하고 있었다. 혜신은 혹시나 싶어 유심히 아이들을 살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등을 탁 때렸다.
“아얏”
혜신이 뒤돌아보니 얼마 전 광통교에서 만났던 일동이었다. 일동이는 혜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무척 반가운 표정이었다. 일동이 혜신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혜
신도 반가운 나머지 일동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일동은 지난번보다 더욱 야위고 기운 없어 보였다.
“밥은 먹었니?”
아이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곁에 있던 강 상궁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일동에게 내밀었다. 일동이 열어보니 주먹밥이었다. 일동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혜신도 놀란 눈치였다. 사실 지난번 혜신이 일동을 만날 때 강 상궁은 멀찌 감치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혜신이 운종가에 들르겠다고 하자 강 상궁은 얼
른 주먹밥을 준비했다. 강 상궁이 얼른 먹으라고 하나를 일동에게 건네주자 아이는 주저했다. 지난번 형에게 호되게 혼난 터라 덥석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혜신
이 일동에게 말했다.
“얘! 염려 말고 먹어 괜찮아”
일동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허겁지겁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게 눈 감추듯 주먹밥을 먹어치운 일동의 얼굴엔 금새 생기가 돌았다. 그때 일동의 형이 나타났
다. 형을 보자 일동이의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되었다. 혜신과 함께 있는 일동을 본 형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동생의 멱살을 잡으려하자 혜신이 가로막았다.
“비키시오”
그때 혜신이 형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 역시 얼굴에 핏기가 없이 창백했다.
“너도 곡기를 입에 대지 못한 지가 오래된 것 같구나”
형은 혜신에게 대들면서 말했다.
“그게 댁과 무슨 상관이요?”
혜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살아있어야 네 동생도 지킬 것이 아니냐?”
그때 강 상궁이 엄한 얼굴로 형 앞에 나섰다. 강 상궁의 체구에 흠칫 놀란 형이 뒷걸음질 쳤다. 강 상궁은 말 한 마디하지 않고 고갯짓으로 주먹밥을 가르켰다. 강
상궁의 기에 눌린 그는 그녀가 내민 주먹밥을 하는 수 없이 받아들고는 억지로 한 입 베어 물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먹지 못해 허기졌던 그는 마치 자석에 끌리 듯
주먹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형도 며칠은 족히 굶은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혜신은 아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묵묵히 곁에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갑자기 부끄러워졌는지 고개를 돌리는 형에게 혜신이 물었다.
“네 이름은 뭐니?”
“양 이수요”
그는 밥을 먹고 나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양인이었던 부모님은 작년 봄 느닷없이 들이닥친 도적떼에게 칼을 맞아 돌아가셨고 그 후 어찌하다보니
광통교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일동이는 막내 동생이고 바로 밑에 여동생인 끝순이는 남의 집 심부름을 하며 먹을 것을 얻어와 근근이 먹고 살았는데 흉년이 들
면서 그마저도 일이 없어져 굶기를 밥 먹듯 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혜신은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과 헤어져 돌아오던 길에 혜신이 강 상궁에게 말했다.
“저 아이들 굶지 않도록 자네가 먹을 것을 좀 챙겨 주게”
“예 옹주마마”
한편 증표를 구하지 못한 언국은 수련도감 주변에서 기웃거렸다. 어떻게든 들어가야 하지만 증표가 없으니 뾰족한 수가 없었다. 수련도감 대문 앞에서 그는 호랑
이의 눈을 피해 멍석을 둘둘 말아 덮고는 밤하늘을 보며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
역관들이 사는 으리으리한 기와집 사이로 적선동에서도 가장 작고 허름한 집이 형우가 사는 집이었다. 형우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국은 아버지에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급히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온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서방님 이제 오셔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지요?”
언국의 어머니는 한결같았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그리 불편하다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동네 빨래를 도맡아 대신해주고는 찬거리
를 얻어 올 정도로 억척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라고 이런 고된 삶이 좋기만 했을까?
아버지의 동료 의관들은 퇴궐하면 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돈 많은 양반님네들의 부름에 달려가 진료하고는 두둑이 돈을 챙겨 꽤 부유한 생활을 은밀히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올곧은 아버지는 그런 제안이 들어와도 번번이 거절했다. 어머니도 서방님이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애당초 기대도 안 했다. 때론 고단한 삶에 한숨
이 절로 나오기도 하지만 의롭고 정직한 사람이 내 남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인도 온종일 고생 많았소. 오늘은 번이 바뀌어 저녁만 먹고 다시 가야 하오. 김숙의 마마님께서 영 차도가 없어서 큰일이야. 이따 가서 잘 살펴야겠네. 주상전하
께서 오늘은 특히 내게 부탁까지 하셨네”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 얼른 저녁 드셔야겠어요. 다 준비됐으니 밥상 차릴게요”.
어머니가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가고 언국이 곁에 있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오늘은 번을 서시는 날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언국을 보더니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번을 서야 할 의원이 다급한 사정이 있어 이 아비가 대신 번을 서기로 했단다”
언국은 무척 서운했다.
“아버지는 왜 만날 번을 그리 쉽게 바꾸어 주십니까? 그러니 다들 아버지를 가벼이 여겨 아버지께만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오늘은 제게 명나라 다녀온 이야기해
주시기로 약조했어요”
아들과 한 약조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버지가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내일은 꼭 이야기해주마! 그런데 언국아 아비가 무조건 청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란다. 사람의 일에는 경중이란 것이 있지. 위급한 일로 아비가
번을 바꾸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보람 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만약 그런 것으로 이 아비를 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들의 인격
이 모자란 것이지”
언국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맞다 싶으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언국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그때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나왔다. 밥상 위엔 갓 구운 고등어 두 토막과 나물 그리고 작은 종지에 김치가 놓여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래기 된장국과
나란히 놓인 밥공기엔 보리밥이 수북이 담겨있었다. 소박한 밥상에 둘러앉은 세 식구는 밥을 먹는 와중에도 웃음꽃이 끊이질 않았다. 행복했던 그때를 떠올리던
언국은 그리움과 서러움에 눈물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