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많이 수척해 보였다. 이제 세월을 못 이기는 나이. 바짝 마른 몸에 걸쳐 입은 양복은 엉거주춤 모양으로 이곳저곳이 흘러내려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노인은 진료를 받은 후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늦가을에 핀 장미’, 000 시집.
‘시집을 한 권 냈습니다. 시간 되시면 천천히 읽어봐 주십시오.’
간혹 책을 선물하는 환자들이 있다. 자신이 낸 책이라며 수필집, 시집, 때론 전문 서적에 논문집까지 주고 가시는 분들이 있다. 언제 이런 글들을 쓰셨냐고 대단하다며 책을 받곤 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산수(傘壽)를 넘긴 노인의 시집은 대단함을 넘어 인생의 무게가 주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렇기에 노인의 시집은 진료실 책상에 며칠을 그대로 있었고, 틈이 날 때마다 나는 시집을 펼쳐 들었다. 노인의 시는 그가 살아 온 인생이었다. 내가 몰랐던 그의 감정이었고, 사건이었고, 역사였다. 조그마한 진료실에서 그와 만난 시간이 어언 15년이 되는지라 어떤 시는 내게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지난 시절 그를 만나며 병마로, 가정사로 그가 겪었던 인생의 절망, 슬픔을 지켜봤던 터라 시어들은 막연하지 않게 내 가슴 속 기억을 하나둘 들춰보게 하였다.
노인은 키가 컸다. 큰 키의 노인 옆엔 항상 부인이 있었다. 마치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노인의 부인은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장병으로 노인이 숨이 차 말하기가 힘들 때면 부인은 종달새처럼 모든 걸 상세히 말해주곤 했다. 그런데 몇 년 뒤 노인의 부인이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홀로 내원한 노인은 부인이 치매가 왔다고 했다. 그리고 또 몇 년 뒤 어머님은 어떠시냐고, 부인의 안부를 묻는 나의 질문이 뜸해질 즈음 노인은 얼마 전 아내가 하늘나라로 갔노라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당시 노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안 것은 노인이 주고 간 시집을 통해서였다. ‘가슴에 쓰는 애절한 시’, ‘당신의 빈자리’, ‘당신을 다시 만나면’ 먼저 보낸 아내에 대해 애절함이 묻어있는 시들이 눈에 띄었다.
‘당신의 눕던 자리는/아직도 따뜻한데/내 마음은 시리기만 하고/생의 여정을 풀어 놓고/당신의 이름 불러본다.’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지, 아내를 떠나보냈을 때 노인의 마음은 누구보다 슬프고 애잔했다.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자신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던 아내가 치매에 걸렸을 때도, 치매에 걸렸더라도 살아만 줬으면 하는 아내가 세상을 먼저 떠났을 때도 노인은 담담해 보였으나 가슴 속엔 눈물이 쌓이고 있었다. 그것이 눈물이란 걸, 슬픔이란 걸, 그리움이란 걸 노인은 시를 쓰고 나서야 알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삶이 때로는 너무도 건조하고 삭막하다고. 감동은 그저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건 내가 너무 드러난 표상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꺼풀을 한 층만 벗겨도 사람들 마음속에는 내가 알아야만 했던 삶의 아름다움, 애틋함,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있다면, 나의 진료는 이전의 것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