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탐험가 Jul 13. 2024

오랜만의 연락

이진휘의 [긴 밤의 약속]을 읽고

“안녕하세요 형. 오랜만이에요. 저 진휘에요. 잘 지내셨어요?”

몇 년 만의 연락이었다. 진휘에게 카톡이 왔다. 오랜 침묵을 깨고 올 연락이라면 무엇일까? 어쩌면 꼭 들어야만 하는 슬픈 소식인 걸까?

“이번에 수경과 제 이야기로 책을 내게 됐어요. 그동안 자주 연락을 못 드렸는데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책이라고? 아 드디어 책을 냈구나! 링크를 타고 들어갔다. 세련된 표지에 [긴 밤의 약속]이라는 제목과 함께 진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인티N이라니 좋은 출판사인 것 같았다. 베스트셀러 작가 박웅현 씨의 책들을 재출간하고 있는 출판사니까. 띠지에는 SBS <궁금한 이야기 Y>에 출연했고, 영화 판권도 계약되었다고 쓰여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오 진휘! 너무 오랜만이야! 안 그래도 가끔 생각나곤 했었는데.. 이렇게 책으로 나왔다니 꼭 읽어볼게. 읽고 리뷰 쓸게.”

몇 년만의 카톡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답을 남겼다. 리뷰 쓰는 게 무슨 큰 일인 양 말한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의 나에겐 버거운 일이지만, 그 둘의 삶에 비하면 뭐가 그리 어려운 것일까 싶어서.


수경이는 대학생 때 동아리를 통해 만난 친구였다.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방학 때 팀으로 해외를 같이 나갔다 오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수경이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각자 학교에서 밴드를 했고, 건반을 맡았다. 키치 한 감성이었고, 책을 읽었다. 무엇보다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열쇠로 우리는 무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성별만 다를 뿐, 마음속은 똑같다고. 하지만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또라이라고. 서로에게 막말을 하며, 우리는 만날 때마다 마음의 이야기들을 신나게 - 혹은, 너저분하게 - 나눴던 것 같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 동질감을 느꼈던 친구였다.

어느 날 수경이가 세계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4학년인데 졸업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난 수경이의 소식은 가끔씩 sns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한 번씩 한국에 나올 때는 함께 밥을 먹으면서 여행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후 돌아온 수경이 곁에는 진휘가 있었다. 진휘의 첫인상은 선해 보였다. 몸집은 왜소했지만, 왠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둘에게 어떤 스토리가 있을지 궁금했다. 김밥집에서 대충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앞으로 종종 만나게 될 테니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휘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수경이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병원에 있다고.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경이는 이미 수술 중이었고, 밖에서는 수경이 여동생과 제부, 그리고 진휘가 참담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수술이 잘되길 함께 기도하는 것뿐.

나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그 후로도 수경이 투병 소식을 관심을 가지고 들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말을 하거나 무엇인가 삼킬 수도 없을 정도라고 했다. 면회가 가능해진 어느 날, 수경이를 찾아갔다. 하지만 수경이와 깊이 소통하는 건 불가능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수경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혼자 말을 하는 것도 어색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뭐라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입이 꾹 다물어졌었다.

결국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수경이 곁을 지키고 있는 진휘였다. 진휘에게서 수경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수경이 곁을 지키며 느끼는 절망과 고통이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걱정됐다. 간병이 무척 고되고 어려울 텐데, 가족들도 힘들어하는 이 일을 이 친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는 벼랑 끝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진휘 앞에서 무슨 말을 그리도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뭐라도 돕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안타깝다는 좌절감을 말하며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 수경이에게 말할 수 없으니 진휘에게 쏟아부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다 보니 주제넘은 말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수경이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매번 진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을지도 모른다.

“수경이가 완전히 회복되는 게 불투명한 일이면, 너도 너의 길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진휘는 수경이를 간호하겠다는 결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정이 너무나도 빛나고 고귀하게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소액의 후원금을 진휘를 통해 매달 보내는 일뿐이었다. 불어나는 병원비에 비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액수였지만, 그렇게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다고 꾸준히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 자신이 무너져 버린 때가 왔다. 내 사정이 너무 급해져서 버틸 수가 없었다. 찐친이네, 마음이 똑같네 하던 지난날들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내가 살려고 수경이를 놓아야 했다. 진휘 앞에서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미안했다.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진휘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들어왔겠는가?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아파하면서 포기한다고, 자기라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만 해주셔도 감사한데, 후원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형.”

언젠가는 다시 후원을 재개해보기도 했지만, 개인 사정에 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 이후로는 수경이를 만나러 가지도, 진휘에게 연락을 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수경이의 소식을 듣는다면 기적이 일어났다거나, 천국으로 떠났다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수경이의 기억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 점차 가라앉았다.


진휘의 카톡을 받자마자 책을 구매했다. 책을 펼치면 기억 속에서 어떤 감정을 마주치게 될까 두려웠다. 책 표지를 멍하게 보고 있다가 용기를 냈다. 불편함을 뚫고 들어가 내 속마음을 직면하리라.

책을 펼치자 나는 시간 여행을 떠났다. 진휘의 글을 통해 수경이의 모습이 조금씩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잊고 있던 기억 중에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것도 있었고, 희미하게 느낌만 남은 것도 있었다. 수경이가 여행을 떠나기 전의 통통했던 모습도, 사고를 겪고 나서 짧은 머리로 병실에 누워있던 모습도, 병실 밖에 앉아 진휘의 고민을 숨죽여 듣던 기억도 살아났다. 앉은자리에서 새벽까지 책을 완독 했다. 중간에 덮어두고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그들의 시간을 온전히 다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상상으로 더듬어가며 글을 읽어나갔다.

10년이라는 시간이 3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압축되어 있었다. 1부에서는 수경이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투병생활을 시작하는 내용이 급박하게 전개된다. 2부에서는 진휘와 수경의 만남과 사랑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3부에서는 수경이가 고향인 청주에서 투병생활을 계속하고, 진휘도 자기 길을 찾지만 결국 수경이 곁에 머무르는 내용이 나온다. 4부에서는 두 사람의 일상에서 찾아내는 작은 행복들과 소망에 대해 엿볼 수 있다. 끝없는 싸움 중에서도 잠깐씩이나마 웃고 꿈꾸는 그들을 보며 마음이 아릿해졌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 강렬하게 남은 건 두 가지였다. 첫째는, 여자친구를 간호하는 한 남자의 뜨거운 사랑. 10년의 세월은 그 누구도 진휘의 진심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스리랑카에서의 짧은 만남이 어떻게 이런 사랑으로 자라나게 되었는지 신비롭게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사랑이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이 상황에 나를 대입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대답은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돌고 돌아도 나는 결국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159)”고. 둘째는, 심연을 이겨내는 자의 위대함. 오랜 환자와 간호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과 절망이 얼마나 큰지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심연이 일상이 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심연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없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심연의 현실을 받아들이고도 소망을 잃지 않는 수경이의 모습, 특히 생일 선물로 운동화를 사달라고 하는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진휘와 수경이를 존경하고 있는 것 같다.

죽을 것 같이 힘들면서도 10년을 곁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슈퍼 숭고함’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했고, 어쩔 수 없었다. 고통과 무의미, 아픔 등 모든 것이 버무려지며 현실의 시간은 흐른다. 때로는 수경이가 아닌 진휘 자기 자신을 위해서(186),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곁에 머물러 있는 처절함. 인간의 한계 앞에서 끝없이 보게 되는 잔혹한 현실. 그 인간적인 모든 것이 그래서 결국 숭고함이 된다. 진휘의 말투로 하자면 숭고함으로 수렴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죄책감’이 내 마음을 크게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찌되었건, 나는 그들을 떠나왔지 않은가? 무력한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친구를 외면해야만 했다. 나는 겁에 질렸고, 압도되었다. 의무감에 아무 말이나 해댔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보는 게 불편하고 두려웠다. 가게 사장에게 컴플레인 하듯 가벼이 신을 원망했다. 왜 그들의 고통을 내버려 두고 있냐고. 하지만 그런 마음들의 뿌리에는 가장 이기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지만, 이런 나를 드러내고 싶다. 나는 그들의 고통이 나의 것이 될까봐 두려웠다. 고통과 엮일까봐 겁났다. 내 평생 고통은 지긋지긋한 것이었으니까. 내 시선은 결국 내 자신의 고통에 있었다. 자기 고통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국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법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런데 거기서 멈춘다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혼돈스러운 고통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아름다움. 물론, 고통의 무게 앞에선 아름다움이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아름다움은 고통의 무게 만큼이나 빛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2243m 스리파다 새벽 하늘의 별 빛이(101) 그리도 아름다웠지만, 심연의 깊은 곳에서 사랑을 지켜내는 이들 또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나의 결심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과거의 기억으로 두지 않는 것. 여전히 그녀가 내 삶에서 가장 특별한,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란 걸 부정하지 않는 것. 무너진 현실 속에서 느리지만 천천히 그녀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 끝없이 내려가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를 그녀와 함께 걷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나 하고 있는 일. (159)


진휘가 답을 보냈다.

“네 감사드려요 이번 기회에 한번 찾아뵙고 인사도 드릴게요 ㅎ”

문득 수경이가 보고 싶었다. 손을 놓은 친구로서 보고 싶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만나고 싶다. 수경이를 만난다면 어떨까? 시간이 한참 흘러서 수경이도 나도 많이 달라졌을텐데,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까? 여전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잘 살아줘서 고맙다? 많이 좋아졌다?” 적절하지 못한 말인 것 같다. “보고 싶었다?” 잊고 있었으니 거짓말이다. 차라리 그렇게 말해야겠다. 손을 다시 잡아도 되겠냐고. 이전의 추억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자리에서 다시 친구라고 말해도 되겠냐고.

페이스북 ‘수경이에게 기적을’ 페이지를 들어갔다. 지난 몇 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볼 수 있었다. 책 속에 나온 에피소드들을 사진으로 볼 수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수경이의 얼굴이 밝아보여서 좋았다. 몸이 불편할 뿐, 어쩌면 삶을 더 충실하게 사는 건 나보다는 수경이가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붙들고 있는 수경이의 이야기가 세상에 한번 더 나오게 되어서 기쁘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들려졌으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마음탐험가'입니다.
동탄에서 고전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에 대해, 모임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트리로 와주세요!
https://linktr.ee/inner._.explorer


작가의 이전글 문득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