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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할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와 지게

by 이미경


소꼴 베느라

산을 옮기느라

다정할 시간이 없었다


두엄 삭히느라

들을 넓히느라

다정할 시간이 없었다


땔감 패느라

지붕 올리느라

다정할 시간이 없었다


지게에 져 올린 세월 팍팍해서 울고 지고

지게에 져 나른 세월 먹먹해서 울고 지고

울 아버지, 다정할 새가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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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줍던 내 기억이 자랄 때부터 아버지는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밤밭을 오르셨다.

우리는 쩔쩔매는 산만디 덜겅을 아버지는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셨다.

닳고 달아 종이짝 같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천근만근 밤자루를 지게로 묵묵히 져 내리셨다.

그뿐이었으랴.

소꼴도, 대추도, 나무도, 볏단도, 거름도, 똥장군도...

지게에 달랑 들춰 업고 성큼성큼 다녔셨다.


"배는 곯아도 자식들 공부는 시켜야제"

가장의 무게를 이고 지고 흘린 땀의 값어치를

"너거 몸 성한 것만으로 되었다"라며 소박한 말로 퉁치신다.

어깨에 박힌 고단함을 잊은 채

여태껏 나는 일주 한 번 못해 본 밤밭을 지금도 한달음에 둘러보시는 아버지,

"내 다리가 아파서 경운기 없으면 어디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하시면서도

밤밭에 오르는 발길을 멈추지 않으신다.


"미경아, 고사리 필요하나?

햇고사리 끊어 와 뭉티기 지어놨다.

작은 논에 채소 갖가지 있으니, 필요한 만큼 뽑아 가고........

시금치고 상추고 채소가 잘 되었더라.

내 혼자 다 먹을 수 있나.

요 앞전에 뽑아다가 회관 앞에서 동네 사람들 나눠 줬다."


그간 사는 게 바빠서 다정할 시간이 없었던 아버지, 꼬불쳐 둔 사랑을 자꾸 꺼내주신다.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던가.

"씨 뿌려 놓고 가만있으면 그저 커는 줄 아나?

맨날 들다 보고 가꿔 줘야 뭐가 돼도 되는 거라"

애지중지 자식들에 따스한 손길 한 번 더, 촉촉한 눈길 한 번 더 보태시는 아버지,

아침 댓바람부터 들로 산으로 나가 털털털 탈탈탈 경운기 소리를 들려주시고 계실 거다.



노릿한 밤꽃향이 스며들제 저미는 그리움은

우리가 다정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

풋풋한 밤송이 알알이 여물어갈 때 커지는 소망은

우리가 다정할 시간을 채워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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