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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Jul 19. 2024

나는 장마철에 쇼팽피아노협주곡을 듣는다.

F. Chopin | Piano Concerto No.1, Op.11



듣자마자 어떻게 그의 음악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싶도록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들을 수없이 써낸 프레데릭 쇼팽. 그러므로 진부한 취향이라고 치부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어릴 때부터 한결같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오래도록 쇼팽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의 음악을 워낙 좋아하여 자주 즐겨 듣다 보니 내 나름대로 그때그때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마치 정해진 법칙처럼 척척 맞춤으로 찾아 듣는 레퍼토리와 같은 것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요즘과 같은 장마철, 특히 어제오늘과 같이 이렇게 아스팔트 바닥에 깊은 웅덩이들을 만들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꼬옥 생각나는 음반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장 마르크 루이사다(Jean-Marc Luisada)와 탈리히 사중주단(Talich Quartet), 그리고 Benjamin Berlioz가 함께 연주한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이 녹음된 음반이다. 사실 이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내가 수년 전 과거 어느 한 직장에 재직 중이던 시절, 고된 날이면 창가에 기대어 서서 우수에 잠긴 채 창밖의 녹음(綠陰)을 바라보며 듣곤 하던 곡이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그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도 않고, 창가에 기대어 이 협주곡을 듣는 일도 더 이상 없어진 지 오래이지만 애착 음악과도 같은 이 곡을 들을 때면 마치 프루스트 효과처럼 그때의 기억과 인상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눈 깜짝할 새 과거의 그 순간, 그 장소로 나를 훔쳐다가 데려다 놓는다. 창 밖의 짙은 녹음 위로 마치 단지 안의 꿀이 쏟아진 듯 노란 햇살이 덮여 있던 어느 여름날의 그 광경 앞으로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딱 이맘때쯤의 비 오는 어느 날 들었던 Jean Marc Luisada와 Talich Quartet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내게 그 장면을 보여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와 쇼팽 사이에, 아니 나와 쇼팽피아노협주곡 1번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추억을 빚어 주었다. 이전에 늘 들어왔던 이 Op.11과는 아주 색다른 감상을 이 연주에서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 연주를 듣던 당시의 창밖에서 들려오는 쏴아 쏴아 쏟아지는 빗소리, 찰박찰박 바닥에 부딪히는 거친 빗방울 소리, 어디엔가 고여서 흐르고야 마는 물소리, 현실이 아닌 이세계 여행이라도 하는 듯 생소하도록 먹먹하고 습한 기운으로 가득 찬 공기, 피부에 닿는 촉촉하고도 서늘한 감촉, 이 모든 것들이, 이들이 만들어 낸 가슴을 에는 듯한 음색과 어우러져 매우 새롭고도 완벽한 하나의 감상 그리고 심상을 창조했다. 그리하여 이 완벽하고 멋진 하나의 심상은 이후에도 장마철이면 나를 찾아와 다시금 내가 그 아름다운 순간에 흠뻑 젖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오늘 나는 빗물에, 그리고 그들의 연주에 또다시 흠뻑 젖고야 말았다. 기분 좋은 잠윤이다.






Jean-Marc Luisada와 Talich Quartet 그리고 Benjamin Berlioz의 쇼팽 피아노협주곡 음반과 함께 하는 아침. (IG @myhugday)



유튜브에도 해당 음반의 영상이 있어 링크를 첨부한다. Jean Marc Luisada(pf), Talich Quartet, Benjamin Berlioz가 연주하는 Chopin Piano Concerto No.1 in E minor, Op.11의 2악장이다. 유튜브에 전악장이 한데 들어있는 영상은 없어서 각 악장별로 찾아 들어야 한다.♬




그림 속 창밖에는 비가 오는 것 같지 않지만 이 글을 쓰면서 이 그림이 딱 떠올랐다. <The Girl by the Window> by Edvard M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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