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경신하는 능력치, 하지만 정작 나를 무너뜨리는 건?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셨다.
두 분은 항상 바쁘셨고, 나는 집밥보단 외부에서 먹는 음식에 더 익숙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엄마가 근처 음식점에 선불결제를 해놓곤 학교 끝나면 그리로 가서 밥을 먹으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보면 딱한 어린 시절 같지만, 나에게는 따뜻한 추억이다. 나를 믿고 보낼만한 식당이 어딜지 이곳저곳 비교하며 고민했을 엄마와 그런 우리의 사정을 알고 나에게 유독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식당 아주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종종 오빠랑 특별식 먹으라며 보너스 용돈을 받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신이 나서 이것저것 사 먹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단점을 낳았으니, 바로 집밥요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해졌다는 거다.
엄마가 직접 요리해 주는걸 별로 볼 기회가 없다 보니 요리에 대한 기본 상식조차 없었다. 오죽했으면 결혼하고 신혼집에 둘 기본양념을 사야 하는데 고추장을 사면 고춧가루는 안 사도 되는 건지, 까나리액젓은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간장처럼 필수템인 건지 뭔지 아무런 분간을 못 해서 마트직원을 붙들고 하나하나 코칭을 받았을 지경. 지금 돌아보면 엄마에게 물어봤을 법도 한데, 당시엔 엄마도 모를 것 같아서 애초에 물어볼 생각조차 안 했었다.
신혼여행 후 첫 저녁식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만만해 보이는 유부초밥이랑 떡볶이를 준비했다가 결국 10시가 다 되어 밥을 먹었던 기억.
이랬던 내가 먹고 싶은 거 투성이인 임산부 상태로 이역만리 독일에 오게 되었다.
그것도 한인식당을 가려면 한 시간 반동안 아우토반을 시속 200킬로로 밟아야 하는 작은 소도시로.
인간을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치킨을 먹고 싶으면 우유와 카레가루에 재운 닭고기에 전분가루를 입혀서 기름에 뚝딱 튀겨먹고
육개장이 먹고 싶으면 파기름을 내서 야채, 고기, 고춧가루 볶다가 멸치육수 넣어 끓여 먹고
돈가스는 고기 두드려서 직접 튀김옷 입혀 튀기고, 직접 만든 루로 돈가스소스까지 만들고
갈비, 잡채, 수육, 김밥, 제육덮밥, 로제떡볶이, 뭐 못 만드는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산 같았던 요리를 이렇게 해내다니,
고기를 통째로 파는 이곳에서, 1kg 덩어리 고기를 종잇장처럼 하나하나 손으로 얇게 썰어 부드러운 불고기를 만들어내는 나의 모습에 자아도취해서 남편에게 나의 성에 찰 때까지 칭찬을 요구하긴 하지만.
어디 그뿐인가, 손가락 하나 베어도 하루종일 그곳만 움켜쥐며 엄살을 떨던 내가 낯선 땅에서 의사소통 실패로 무통주사도 없이 쌩으로 찍소리 하나 안 내고 아기 낳고, 남편이랑 그저 서로만 의지하며 조리원 안 가고 몸 회복하고, 몸짓 발짓으로 간호사한테 수유법 배워서 완모(완전모유수유)하고, 독일엄마 따라 한다고 공공장소에서도 당당하게 수유하고, 이유식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직접 만들어 먹이고, 독일밥이 맛없다는 남편 위해서 매일 점심 도시락도 싸주고, 쿠팡도 없는 이 땅에서 차 끌고 마트 이곳저곳을 다니며 필요한 물건 직접 장보고 옮기고, 그 와중에 돈도 벌어보겠다고 구매대행 사업도 해보고, 독일어도 배우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능력치를 경신하면서 느끼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독일살이 한 해 한 해 지날 대 마다 변하는 나의 모습에 나조차도 깜짝 놀랄 지경이다.
여기서 3년을 더 살게 되면 직접 회도 떠서 먹을 수 있게 될 것 같다. (실제로 그런 분이 꽤나 계신다.)
그러면서 나의 한계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직접 가드닝도 하게 되고, 독일어까지 유창해져서
나중엔 직접 키운 야채를 사용하는 웰빙한식당을 개업해서 독일에 K푸드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는 한인여성사업가가 되어 국내 메이저 일간지에 얼굴이 실리는 그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한국에 갈 때가 아닌 것 같다. 한 번 사는 인생, 나의 한계를 찍어보고 싶다는 열정이 불타오른다.
독일, 이곳은 나를 성장시키기에 제격인 곳이다.
뜨거워진 가슴을 안고 아들을 픽업하러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저 멀리 10대 청소년 무리가 걸어오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내 곁을 스칠 즈음, 여김 없이 들려오는 한 마디 '칭챙총'
괜히 혈기왕성한 10대들이랑 엮여서 좋을 거 없다는 생각에 못 들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간다.
어린이집 도착, 아이 데리고 집에 가려는데 놀이터에 가고 싶다는 이 녀석.
그래, 힘 빼고 들어가야 오늘 잘 자겠지 싶어서 발걸음을 놀이터로 돌리지만 마음 한편이 무겁다.
놀이터에 도착했는데 역시나 우리만 다르게 생겼다.
게다가 다들 저마다 일행이 있는 것 같다. 여기 아이랑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인가?
아이는 자꾸 다른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 하는데 나는 여기서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고 입도 안 떨어진다. 어렵사리 상대 아이에게 독일어를 내뱉었는데 이상한 눈빛으로 날 빤히 보더니 다른 데로 가버린다. 괜히 나의 독일어를 자책하고 우리 아이에게도 미안해진다.
어찌어찌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간다.
마트직원이 나를 외국인취급하지 않고, 다른 손님들에게 하듯 친절하게 인사하고, 적립카드 유무도 물어보고, 마무리 인사도 날려준다. 괜히 기쁘다.
성공한 여성 한인사업가고 뭐고, 그냥 평범한 한국인으로 편안한 일상을 살고 싶어 진다.
분명 성장했다.
내가 절대 할 수 없었던 것을 불과 몇 년 만에 척척 해내는 나 자신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고 앞으로의 나의 모습에도 기대가 된다.
하지만 외부 환경에 취약해졌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람들의 눈빛 하나에 상처받고, 미소 하나에 회복한다.
칭챙총 따위의 말에 내성이 생기기도 했다. 이젠 그들이 길거리에 내뱉은 쓰레기를 굳이 내 주머니에 주워 담지 않는다. 어린이집에서 몇몇 마음 맞는 엄마들이랑 친구가 되었고 종종 그들과 플레이데이트를 하기도 한다. 마트직원이 나를 다른 독일인이랑 다르게 대해도 '그럴 수 있지'하며 개의치 않아 하는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뭔가 모를 이 답답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한국에 있었을 땐 생각지도 않았던 도전을 하게 해 주고,
그 도전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해 주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는 해외생활.
하지만 때론 내 정체성 자체가 약점으로 다가와서
그 꿈이 다 부질없이 느껴지고
큰 공허함이 생기는 해외생활.
그 두 지점 사이 어딘가에서 오늘도 울고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