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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비

by 온호

먹 먹은 화선지를 한 장 갖다 대 놓은 것 같이 세상 빛이 은은하게 어둡다. 나뭇잎의 초록빛도, 나무 기둥의 고동빛도, 하늘빛도, 아스팔트나 인도 블록도 모두 전혀 새로운 색이 되었다. 이렇게 비가 내려 더 운치 있어진 캠퍼스를 거니는 일은 특별하지만 비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동시에 대학시절의 낭만이고 자유로웠던 때의 홀가분함이다. 만끽하기로 했다.


비가 오면 자전거를 타고 기술교육원까지 이동하기가 어렵다. 비가 오는데도 부득이하게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던 때를 생각하면 뒷감당이 걱정된다. 빗 속에서 자전거 타는 것이야 불쾌하지 않다.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면 물이 튀어 쾌감이 있고 신발과 옷이 젖고 흙이 튀는 것도 그렇게 싫진 않다.


문제는 그 상태로는 교실이나 의자, 책상을 더럽히게 되고 옆 사람에게까지 축축함을 전염시킬 수 있다는 것에서 생긴다. 그래서 비 올 때는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다. 그럴 땐 지하철 한 번이나 버스 한 번으로 갈 수 있는 장소였으면 좋았겠다며 없는 현실을 괜히 상상하게 된다. 도움도 안 되고 안 좋은 기분만 들게 하는 그런 상상보다는 그래도 자전거를 타며 하체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아도 돼서 좋고, 지하철로 갈 땐 시간 관리하는 연습을 해서 좋다는 생각으로 옮겨 간다.


어찌 됐건 비가 올 때만 비를 맞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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