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2 레몬 세 알을 샀다. 귀갓길에 집 앞 마트에서, 하얀 스티로폼 쟁반 위에 세 알씩 랩으로 싸져 있는. 세 알씩 포장 되어 있는 상품이 모두 다섯 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 세 개의 꼭지가 전부 초록색인 것을 찾아내서 샀다. 레몬청 만들기가 내 담배고 술인가 보다.
3 내 핸드폰 충전기를 빌려줬다가 제 때 돌려받지 못한 여파가 책상 위에 미쳤다. 책상 뒤에 테이프를 붙여 고정해 놓은 선 세팅에 변동이 생겨 불편을 겪게 된 것이다. 짜증과 탓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 기분을 오래 끌고 가는 대신 귀찮은 것을 즉시 감수하기로 했다. 테이프를 꺼내 들고 책상 밑에 들어가 누워서 책상을 당겨내고 선을 다시 수습했다. 그러자 괴로움은 지난 일이 되었고 없었던 일이 되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꿈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이 되었다.
1 중랑천 수변 공원을 따라 따릉이를 타고 귀가하면서 크고 빨간 장미가 피어있는 길을 봤다. 가로등이 있다 해도 어둔 밤이 배경이었지만 장미의 붉은 빛은 강렬했다. 평소에 그 장미들을 볼 때마다 샘솟던 밝은 장면들-청년들과 걸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모여서 같이 밥을 먹는 모습 같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속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던 좋은 기분도 전혀 들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 생각 안 드네'하는 생각만 들었다.
0 어제 강사님께 배운 것을 오늘 드디어 혼자 실습해 볼 시간이 생겼는데 조교분이 다른 방법을 알려주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게 더 빠르다고. 나는 어제 배운 것을 내 몸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보고 안되는 부분이 어디일지 알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됐다. 조교분은 심지어 내가 강사님께 배운 방법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시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할 수 없게 됐고, 내가 필요한 도움은 받지 못하면서 계속 코칭을 들어야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답답한 기분을 참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근데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나는 그 때 울고 싶어졌다.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곁에 와서 알려주는 사람에게 방식이 안 맞다고 "필요없으니까 가라"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의욕이 심하게 사라졌다. 대답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고 조용히 10초 정도의 시간을 쳐진 기분을 바꾸려 하지 않고 둔채로 흘려 보냈다.
그리고 솔직하게 내 기분이나 상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타박받는 느낌은 여전했지만 내 입장도 인정을 좀 해주시면서 다시 진행이 됐다. 그 후 내가 애교도 부리고, 고집 부리는 것에 대해서도 사과 하면서 분위기가 조금 나아지고 내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4 요즘 글을 써 올려도 되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며칠 전엔 올리려고 다 써 둔 글을 저장해둔 채로 발행을 하지 않았고 오늘도 글을 올려도 되나 생각했다.
근데 오늘 오후, 기지개센터 프로그램 쉬는 시간에 한 청년 분이 내 "청년 플랜 브릿지" 브런치북을 보셨다고 말씀하셨다. 브런치북으로 발행한 것이기 때문에 대상 독자가 비교적 분명했고 소재도 일관적이어서 더 읽힐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내가 쓴 글을 읽어보려고 한 분들이 계셨다는 게 오늘 글을 쓰게 해 준 힘인 것 같다.
오늘은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못난 모습이나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행동들을 너무 많이 했다. 그걸 알게 됐을 때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었다. 나는 아직도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