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런 일 저런 일

서울시 기술교육원

by 온호



반달이 굴뚝 위에 절묘하게 위치해서 촛불처럼 보이는 게 재밌었던 저녁이 있었다. 다섯 시에 도서관 일을 마치고 그대로 도서관 매점에서 김밥을 하나 데워 먹은 뒤 자전거로 이동하면 기술교육원에 도착하는데, 요즘 그 시간의 하늘은 잔뜩 어둑어둑한 덕에 신기한 장면을 구경하게 됐다.


잠깐 새는 얘길 하자면 얼마 전 저녁에 나는 스스로에 대해 심한 충격을 받게 되는 일을 겪었다. 충전기 선을 책상에 있는 구멍을 통해 내린 다음 바닥에 있는 멀티탭에 꽂다가 그랬다. 왜냐면 나는 그전까지는 멀티탭에 충전기를 먼저 꽂아두고 바닥에 누워서 충전기 선을 책상 구멍을 통해 로 올리는 방식으로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에 아무 생각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책상 에서 아래로 충전기선을 내리던 순간에, 그전까지는 내가 반대로 해오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코미디도 아니고.


'정말로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나한테 얼빵한 구석이 있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그리고 '아니면 나한테 힘든 걸 추구하는 드라이브가 있는 걸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등학교 입학이 가까웠을 때 초등학교 반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도, 계주를 할 때 앞에서 가는 것보다는 뒤에서 쫓아가는 걸 좋아했던 것도, 은둔으로 10년 제자리에 머무른 것도. 힘들어야 추진력이 생기는 그 효과를 받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힘든 길을 선택하고 있던 것은 아니겠지. 언더독 효과를 일부러 받으려는 무의식의 선택? 말도 안 된다. 그냥 너무 몸으로 때우며 살았나 보다고, 머리를 좀 더 쓰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최근엔 무려 7개월 동안 우회로로 다니고 있던 길도 직진길로 다니기 시작했다. 직진길의 존재를 찾아낸 것이다. 비록 7개월 동안 몰랐지만... 괘, 괜찮다.


생각보다 많이 샜지만 이 이야기는 다시 기술교육원 이야기로 이어 돌아온다. 기술교육원에서도 나는 얼빵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며칠 전엔 짝꿍에게 커터칼 날을 어떻게 빗금이 그어져 있는 사선 모양대로 정확하게 자를 수 있는 것인지 물어봤다. 그리고 남들은 어지간하면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벽지 롤을 어떤 방향으로 펼쳐야 하는가를 배우기도 했고, 풀 통을 주 손 방향에 둬야 한다 하는 것들을 배우기도 했다. 이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다른 사소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의 대부분은 원래 취약한 능력인 '공간'을 머릿속에서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겪은 일들이었다.


'난 이런 걸 못해', '난 이런 데 약해' 하는 객관화라고 생각하는 생각이 오히려 나를 가둘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실수를 '공간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패배감을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반복을 해보면서 몸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나면 머릿속으로 그리는 능력이 분명 나아질 것이다.


내 짝꿍은 '현장'일을 하는 사람이다. 왜 이렇게 잘하냐고 했더니 본인이 그렇게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우리 반 20명 중에 인간 자체가 가장 묵직하고 팔랑거리는 일이 없어서이다. 이 사람은 말수가 적고 혼자이기를 꺼리지 않는다. 첫인사와 끝인사가 늘 똑같은 톤에 똑같은 대사여서 메마른 듯 보일 때도 있지만 아주 가끔씩은 농담을 하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순수하게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학업성취도가 좋고, 나한테 알려줄 때도 굉장히 상냥한 태도로 알기 쉽게 알려준다. 사실 이 사람이 알려주는 게 교수님과 조교분이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배우기가 좋다. 또 궂은일을 아무 티도 없이 묵묵히 열심히 한다. 얌체같이 적당히 빠져서 남에게 떠넘기는 사람도 있는데.


'팔랑거리는 일이 없다'는 건 감정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아마 내가 이 사람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힘든 티, 불쾌한 티, 어려운 티 일절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항상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하니까. 아, 먼저 떠나보내면 그만인 깜깜한 따릉이 대여소에서 굳이 뒤에서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다정함도 많이 좋아한다. 다정한데 자기중심 확실한 사람. 나의 이상.


안 좋은 이야기여서 굳이 구체화하지 않기 위해 제목을 '이런 일 저런 일'이라고 했으니 이야기도 두루뭉실하게 하는 데서 그쳐야겠다. 최근 우리 반은 큰 변화를 겪게 됐다. 그 변화로 인해 모두가 상당한 스트레스를 겪게 됐다. 신기한 것은 내가 2년 전 전공 수업으로 들었던 <조직행동론>, 이번 학기에 듣고 있는 <조직개발>이 이 상황을 이해하고 대응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스트레스 상황임을 인지하니 어떤 편견이나 감정이 들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었고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외부 상황에 영향받지 않고 내 할 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문제의 발생 원인을 입맛대로 바꿔 해석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사자의 의지에 반하는 전체 결정이 내려질 뻔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이렇든 저렇든, 내가 원하는 방향이든 아니든 흘러가는 것을 존중하고 내가 건드릴 수 없는 부분보다는 내가 건드릴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이런 교훈을 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배우고 있다는 게 감사하다.


학교에서는 요즘 <고전읽기:프로이트> 강의의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 과제를 진행하기 전에는 기지개 센터 프로그램인 "기지개 마스터" 활동의 과제를 하곤 했다. 출판용 에세이를 쓰고 자기 서사 브랜딩 PPT를 만들고, 굿즈용 이미지를 만들었다. 별로 쉬운 것은 하나도 없지만 산다는 게 이런 거 아니겠다 싶다. 힘들고 짜증 나게 뭔가 배우는 거. 그러고 나면 조금 기분 좋아지는 거.


그래서 금요일에 듣는 <웨이트 트레이닝> 강의 때문에 생긴 지연성 근육통이 꼭 인생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