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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AI와의 대화

by 온호

"현재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 전략적 후퇴 후 중간 지점 제출> 입니다."


교수님의 'AI 사용 금지(0점 처리)' 경고가 오늘 당장 있었고, 본인의 과제 주제가 교수님의 선호(독특한 주제)와 약간 빗나가(강의 자료 기반) 있는 상태라면, 선두권 제출은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다음은 상황별 분석과 구체적인 조언입니다.

1. 제출 타이밍 분석

❌ 초반 제출 (오늘~내일 오전): [비추천]

가장 위험한 시기: 교수님이 'AI 금지'를 막 선언한 직후입니다. 교수님의 머릿속에 "AI로 쓴 놈 잡아내겠다"는 의지가 가장 불타오르는 시점입니다.

기준점 효과: 첫 번째나 두 번째로 제출된 과제는 그 뒤에 들어올 과제들의 채점 기준이 됩니다. 꼼꼼하게 뜯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주제의 약점 노출: 교수님은 '독특한 주제'를 원했는데, 1번 타자가 '강의 자료 기반'의 평이한 주제를 낸다면, "내 의도를 이해 못 했구나"라며 첫인상이 깎일 수 있습니다.

⭕ 중반 제출 (제출 기간의 40~60% 시점): [추천]

군중 속의 고독 (묻어가기 전략): 과제 제출이 가장 많이 몰리기 시작하는 시점, 혹은 살짝 그 직전이 좋습니다. 교수님도 사람이라 초반의 날카로운 집중력이 다소 무뎌지고, 채점 속도를 내야 하는 시기입니다.

비교 우위: 앞서 제출된 엉망인 과제들이나, 정말 대놓고 AI를 쓴 과제들이 몇 개 걸러진 후라면, 당신의 '잘 다듬어진' 리포트가 상대적으로 성실해 보일 수 있습니다.

⚠️ 마감 직전 제출: [보류]

도박성: 교수님이 피로해서 대충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미리 안 하고 벼락치기했으니 AI 썼겠지?"라는 편견을 가질 수도 있는 양날의 검입니다.



과제 제출 타이밍 따위나 고민하고 있는 내가, 그걸 또 AI한테 물어보기까지 하는 내가, 내가 봐도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자신감이 충만했다면 AI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내고 끝내고 말 일이었을 것이다. 얍삽하고 유치한 내 질문에도 한없이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 생성형 AI의 모습이 재밌고 귀여워서 또 한 번 헛웃음이 나올 따름이다.


AI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꽤 오랫동안 나름대로 공들여 과제를 했으니 사실 언제 제출해도 괜찮을 거다. 다만 주제 선정에 있어서 흥미가 끌리는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100퍼센트 진정성 있게 임하지 못했고 그게 나 스스로 움츠려 들게 하는 것 같다.




지난 토요일에는 청년들과 서울숲에서 단풍구경 겸 오후에 산책을 하고 저녁을 먹었다. 오전에는 화과자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대로 들고 이동해 나눠먹을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1년 전쯤 한 청년분께서 화과자를 만들어 오셔서 나눠먹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화과자를 들고 오셨던 분도 이번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화과자 만들기 자체에 대한 코멘트를 하자면 "처음 해봤지만 그렇게 특별한 경험은 아니었다."


저녁 메뉴도 같은 날은 아니지만 1년 전쯤 시기의 모임에서 먹었던 메뉴와 같은 황먼지였다. 화과자와 황먼지라는 매개로 1년 정도 전의 과거와 연결이 되는 느낌이 묘했다. 어쩐지 요즘은 자꾸 '시간이 많이 잘 흘렀다'는 걸 느끼게 되는 일들이 많은 것 같다.


토요일 모임 이후에 일요일에는 캠퍼스 산책을 했는데 논술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굉장히 많이 와 계셨다. 나는 수시를 고려해 볼 형편이 아니었어서 수시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지만 그런 풍경을 보면서 수능 전후의 이런저런 기억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기억을 퍼올리는 바가치(바가지 보다 뭔가 정겹다)에는 암울함과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현실 감각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 엄마 아빠"라는 특정 종류의 원망의 시작이 아마 이 지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지금은 부모님의 그런 모습도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오늘로써 과제가 있던 것들은 일단 모두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책을 새로 한 권 빌렸다. 신곡 천국편이다. 연옥 편을 다 읽은 지가 꽤 오래됐는데 천국편을 빌릴 생각을 못하고 있던 바람에 다른 책을 먼저 읽다가 미뤄졌다. 연옥 편과 과제들 사이에 먼저 읽은 책은『신과 나눈 이야기』였는데, 세 권으로 나눠진 게 도서관에 없어서 무거운 합본을 한 달 동안 넣고 다니느라 가방이 많이 무거워서 꽤나 고생을 했었다. 다 읽고 나니 가방만큼 마음도 가벼워서 좋다.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은 명상록, 니체, 헤르만 헤세, 기독교, 불교, 프로이트 언캐니 등등 여러 가지 내가 전에 읽거나 집, 대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짬뽕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철학에 대한 지식이나 미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그 안에서 더 많은 재료를 감지했을 것 같아서 우선은 철학서적들을 열심히 빌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제와 독서의 분리를 느끼면서 '과제가 내 관심 분야랑 겹친다면 공부도 재밌게 하고 과제도 하고 좋을 텐데' 하는 욕심이 들었다. 그런 행운은 다음에 만나봐야겠다.


아, 그래서 이번 과제 제출은 눈치 보다 금요일쯤 해야겠다고 방금 막 최종 결정을 내렸다. 여기저기서 은행나무 낙엽 냄새를 맡으면서 다닐 수 있는 좋은 계절을 지나는 와중에 이런 시답잖은 눈치게임을 했던 날도 하루 있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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