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꿈꾸고 있을 당신에게

30대 자영업자가 보내는 글 - ① 프롤로그

by 짠영업자

자영업자의 사전적 정의 : 자신의 혼자 힘으로 경영하는 사업자


아직은 뜨내기 수준인 10개월차 자영업자인 내가 '자영업자'의 사전적 의미를 보았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혼자'라는 단어이다.


'혼자'라는 단어는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예전의 느꼈던 감정이 참 다르다.


나는 자영업을 하기 전 내 나이에 비해 비교적 오랜 시간 '공공의 영역'에 몸담았다.


24세 육군장교의 신분으로 군 입대 후, 30세의 나이로 전역할 때까지는 국방의 영역에서 몸담았고, 그 이후에는 공공기관에서 교육의 영역에서 몸담았다.


우리가 흔히 유튜브에서 보는 자영업자들이 처음 사업을 시작하는 계기와는 많이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나는 '사업'이라는 것을 꿈꿔본 적도 없었고,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영향과 그 아내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사업 = 폐가망신'의 공식을 끊임없이 주입받으며 자라왔다.


그런 내가 자영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

포장하자면 생존과 자유에 대한 본능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위에서 이야기했던 내가 육군장교의 길을 선택한 이유도 '생존과 자유' 때문이었다.

나는 남자로서는 흔치 않게 아동복지학을 전공했다. 학과 입학생 30명 중 2명만이 남자일 정도로 극단적인 여초학과였고,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는 선망의 눈빛으로, 누군가는 의아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참 좋았다. 아이들의 맑음이 좋았고, 그 맑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한비야 씨의 책 영향도 컸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 전세계를 누비면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 오죽하면 대학교 입학 면접시험에서 '태녕 학생은 꿈이 뭐에요?'라는 교수의 질문에, '아프리카 오지에서 어린이들을 보살피다 그 지역 풍토병으로 죽는 게 꿈입니다.'라고 대답했을까.


그런 당찬 각오로 입학했지만, 대학생이 되고난 후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대학과 입시라는 틀 속에서 그것만 끝나면 핑크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철없는 생각이 지나간 후에 나를 맞이하는 건 선배들을 통해 바라보는 현실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학과는 졸업하더라도 150만원을 채 벌기 쉽지 않은 학과였다. 그 당시 어린이집 교사의 보수가 99만원이라는 이야기가 한동안 신문을 휩쓸었고, 사회복지관이나 단체에 들어가더라도 150만원 받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리끼리 '복지계의 삼성'이라고 불리는 이름있는 NGO 단체나 기관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200만원 전후의 급여를 받았다.


그 급여가 적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공부를 한 결과물과 그들이 하는 노동과 노력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고, 내가 생각했을 때는 그 노동과 노력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대학입학 면접 때 내가 했던 이야기와는 상반되게, 나는 한편으로는 따뜻한 가정에 대한 꿈도 있었다. 나로 하여금 나의 아내와, 나의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돈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선택한 건 군인이었다. 처음 시작했던 이유는, 막연한 애국심과 멋진 제복을 입고다니는 선배들에 대한 동경이었지만 내가 아동복지학을 전공하면서 그만한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준 공무원의 직업을 갖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첫번째로 나와 미래의 나의 가족들의 '생존'과 경제적 '자유'를 위해 첫 번째 진로를 선택했다.


군생활을 하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이 생기지 않았다. 가족이 생기지 않았으니, 나는 더 이상 생존이라는 과제에 직면해있지 않았다. 군에 있으면서 연애도 거의 하지 않았으니 돈도 꽤나 모았다. 사회생활의 첫 걸음을 시작하는 또래들은 물론, 같이 군 생활을 하는 동기들이나 선배들과 비교해도 꽤 많은 돈을 모았기 때문에 나는 경제적인 자유에 그닥 목매지 않아도 되었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고 나니, 신체의 자유를 되찾고 싶어졌다.

매일매일 같은 생활과 부조리한 일들, 부대에만 얽매여있어야 하는 삶이 아닌, 내가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자유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불안함과 초조함 속에서 살아야하는 생활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전역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내가 이 생활을 앞으로 10년을 더 하면 병에 걸릴 것 같다.'라는 말을 했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더이상 말리지 못하셨다.


'생존'과 '자유'를 위해 선택한 첫 번째 진로를, 아이러니하게도 '생존'과 '자유'를 위해 스스로 그만두게 되었다.


전역 이후 나는 6개월 정도의 백수기간을 거쳤다. 그 기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름대로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던 '쇼핑호스트'라는 직업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채용이 막혀버렸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유행병의 터널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그 기간이 전역 후, 3개월, 4개월이 이어지자 나는 다시 한 번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정말 이대로 폐인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때부터 안했던 공부를 시작했고 오랫동안 놓았던 펜을 다시 잡아들었다. 그리고 운이 좋았던 나는, 감사하게도 내 백수 생활은 6개월 후에 끝날 수 있었다.


합격자 발표가 되는 날,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기뻐서 소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감사하다고 되뇌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임용식을 한 후, 연봉계약서에 사인을 하는데 뭔가 많이 이상했다. 공고에 적혀있었던 최저 연봉과 최고 연봉. 나는 군 생활 경력 중 5년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적어도 나는 그 중간치 정도쯤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한참 못미치는 금액. 출력이 잘못된 줄 알고 인사담당자에게 이 금액이 맞는지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인사담당자는 마치 '네가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라는 듯이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 금액이 맞다고 대답해주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이나 조직의 분위기는 참 좋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불만과 안타까움을 표출하는 급여 문제는 단시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혼을 준비해야 되는 시기에서 그 금액은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고, 나는 점점 작아져만 갔다. 스스로가 별 볼 일 없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 때문에 점점 더 우울해져갔다.


내가 첫 선택을 할 때부터, 그 선택의 큰 방향성이 되었던 '생존'과 '자유', 그 어떤 것도 충족하지 못하는 삶이었다. 나에게는 새로운 길과 방향이 필요했다. 그 때의 나에게, 또 다른 진로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