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조직의 태움 문화에서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쌤~ 얘 좀 보세요. 커피 타는데 물부터 붓고 있어요."
모두가 모인 티타임, 믹스커피를 타는 것은 막내의 몫이었다. 물이 먼저냐 커피가 먼저냐는 타는 사람 마음이건만, 아무것도 아닌 일로 꼬투리를 잡아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 만들어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곳은 이상한 곳이었다. 병동에는 한 명의 희생양이 있었다. 전에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더 눈치 없고 바보 같은 내가 오면서 바뀌었다. 한 명을 집단적으로 미워하고 따돌림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뭉치는 구조였다.
군대도 아닌 곳에서 마치 군대인 양, "너 다시 걸어와 봐. 누가 신발 끌으래?" 라며 기를 죽였다. 잔뜩 혼나고 축 쳐져서 자리로 돌아오다가, 다시 조신하게 선배 앞으로 걸어갔다 와야 했다. 졸업 후 만난 동기들도 대부분 힘들다고 울상 짓긴 했지만, 그 와중에는 적응하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일찌감치 나와버린 친구도 있었다.
부푼 꿈을 안고 취업했건만,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한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병원 취업 합격을 받아놓고, 두 달간 유럽여행을 다니며 자유의 삶을 만끽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3년제 간호과 졸업자가 장악한 병원에 겁도 없이 4년제 간호학과을 졸업하고 들어간 것이 실수였을까. 아니면 키가 크고 예뻐서? 이건 너무 갔네... 그 당시 병원에는 키 크고 예쁜 간호사가 넘쳐났다.
솔직해지자. 나는 신규로서 태도가 불량했고, 일머리도 없었다.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교수님 조언대로 1년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다니고 있었다. 거기다 3교대 근무로 수면 사이클도 엉망인데, 잦은 오버타임으로 제때 퇴근을 못 하니 그나마 주어진 수면시간도 부족했다. 가족과 떨어져 외지에서 혼자 살고 있으니 잘 챙겨 먹지도 못했다. 휴일이면 그저 잠만 자고 싶었다. 이 모든 상황이 합쳐져서 극도의 우울감에 이르렀다.
그때가 아마 일한 지 1년이 좀 지났을 때였다. 이제 후배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밝고 싹싹한 데다 선배들과 같은 학교 출신인 후배들은 어느 순간 나보다 더 인정받고 있었다. 차라리 내 밑으로 아무도 없을 때는 괜찮았는데, 후배보다 못한 선배라는 생각이 들자 자존감이 바닥났다.
각 병동 안쪽에는 간호사실이 있었고, 그 내부에는 조그마한 세면대와 작고 좁은 화장실이 있었다. 어느 날 출근해서 간호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는데 화장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 손목 긋고 죽어버리고 싶다. '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며 손을 씻는데, 차가운 손에 닿는 온수가 너무나도 따뜻했다. 그 따뜻한 물의 온기에 정말 이상하게도 깊은 위로가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OO아... OO아...' 따뜻한 물의 온기와 가슴속에서 나오는 듯한 차분한 목소리는 내 눈가를 촉촉하게 했고, 극단적 선택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매우 용기 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서 이렇게 죽기엔 내가 너무 아까워.... '
그 후로 딸의 자취방에 방문한 부모님이 내 상태를 보고 당장 그만두라고 성화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병원을 그만두고 나왔다. 그 속에 있을 때는 그 세계가 전부인 것 같고, 내가 가장 못난 것 같았는데, 나와보니 별 거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서 해보고,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면 나오면 그만이었다. 바깥에는 또 다른 기회가 있었다. 지금 어떤 상황 속에 갇혀 스스로를 옥죄고 있다면 나와도 괜찮다. 죽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또 다른 무언가가 펼쳐진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고향인 지방도시의 2차 병원에 취업하거나, 미국간호사자격시험을 준비해서 미국으로 가거나, 아니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지원해 보는 등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년간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 끝에 포기하는 마음으로 본 시험에서 합격했다. 그 후로 결혼해서 애를 셋이나 낳고 잘 살고 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도 지금의 삶이 엄청나게 만족스럽지도 않지만 어쨌든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어서 네 살 된 막내딸의 애교에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20년 전 그때를 돌이켜보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때 그 앙칼진 간호사 선배들 덕분에 나는 정년보장되고 육아휴직을 눈치 없이 쓸 수 있는 훨씬 더 좋은 조건의 삶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미움도 슬픔도 없다. 나를 괴롭혔던 그분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연민마저 느껴진다. 그분들도 그들의 인생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이 글을 쓰고 며칠간 우울한 감정에 젖어 무기력한 날들을 보냈음을 고백한다. 20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다시 떠올리는 게 힘들었나 보다. 그래도 이 아픈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졌다 느껴질 때 그저 살아있을 수 있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