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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영전 시즌1 엔딩의 의미

온라인 게임의 지속성과 영원한 상실

by 이상균

지난 달 게임 인재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게임 디자인 고전 자료인 <게임기획 튜토리얼> 강의를 하게 되었다. 두 시간짜리 강의를 하고, 무엇이든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다. 게임기획과 커리어 관련된 질문이 몇개 나온 후, 어떤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


"<마비노기 영웅전> 시즌1 엔딩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나는 잠깐 그 학생을 바라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궁금하냐고 되물었다. 학생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감수성 예민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인지, 그 엔딩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엔딩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느꼈던 슬픔과 상실감이 의도된 것이라면,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예전부터 알고 싶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질문에 성실히 답하리라 마음 먹었다.


아래의 이야기는 내가 <마비노기 영웅전>(이하 마영전)의 기획을 총괄하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재직했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17년 전의 이야기다. 현재 버전의 마영전은 내가 만들었던 초기의 마영전과는 많이 다르며, 다른 개발자에 의해 다른 의도로 디자인되고 있다. 그러니 이 이하의 이야기는 마영전 초기 디자인을 맡았던 이상균 개인의 회고로, 넥슨이나 마영전 개발팀의 입장과는 관계 없음을 미리 밝힌다.




내가 마영전을 디자인했던 시기는 2000년대 후반이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불타는 성전>이 2007년에,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리치왕의 분노>가 2008년에 출시되었으니 그 시기는 그야말로 MMORPG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IMG_0146.jpeg 가상의 이야기와 비슷한 퀘스트를 주는 골드샤이어 사자무리 여관의 여관주인 팔레이.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해본 이가 있다면, 아래와 같은 퀘스트를 상상해보자.


어떤 오크가 집 앞에서 울고 있다. 왜 울고 있냐고 물어보면 아내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앞 산에 있는 은방울꽃을 달여 먹으면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산은 코볼트 일족에게 점령당한 상태다. 집 안쪽을 보니 과연 오크 여성이 침대에 누워있다.


코볼트 일족을 쓰러뜨리고 은방울꽃을 채집해다 오크에게 주면, 오크는 꽃을 아내에게 먹이고, 아내는 살아난다. 오크와 그의 아내는 나에게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15초가 지나면 아내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고, 오크는 또다시 집 앞에서 울기 시작한다. 나 말고 다른 플레이어도 퀘스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 아닌가. MMORPG에서 플레이어와 월드의 상호작용은 어떤 것도 결과로 월드에 남지 않는다. "불의 세례를 받아라!"고 외치는 라그나로스를 우리 공격대가 쓰러뜨려도, 라그나로스는 실은 쓰러지지 않는다. 라그나로스는 공격대가 결성되는 숫자만큼 쓰러진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패치 뿐이다. <워크래프트: 대격변>이 등장하며 데스윙에 의해 불모의 땅은 반으로 쪼개지지만, 그 변화는 플레이어들이 아니라 개발사에 의한 것이다.


(현대의 MMORPG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 패러독스를 우회하지만, 그 시절 대개의 MMORPG는 플레이어들과 이정도 수준을 게임적 허용으로 합의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모순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이 모순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싱글게임과는 달리 디자인에 강요되는 온라인 게임의 지속성(persistence)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플레이어들에게 진정한 상실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IMG_0145.jpeg <마비노기 모바일>에서 재해석된 티이. 원작을 초월해석한 캐릭터라, 다들 한번쯤 경험해보면 좋겠다.


이하의 모든 것들은 2010년 런칭했고, 2011년 완결되었던 마영전 시즌1을 기준으로 한다.


마영전은 플레이어가 로그아웃한 위치와 관계 없이, 무조건 콜헨의 여관에서 게임을 시작한다. 로딩이 끝나고 여관에 도착하면 익숙한 음악이 흐른다. 플레이어는 그 음악을 '여관 배경음악' 정도로 생각한다.


이윽고 낡은 여관을 배경으로 여자 주인공 NPC인 티이가 플레이어를 맞이해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도 좋은 아침이에요", 티이의 대사는 많지 않다. (일부러 많지 않게 했다)


티이와 대화를 시도할 수 있지만 따로 퀘스트가 있지 않는 한 평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플레이어는 [떠난다] 버튼을 클릭해서 여관을 떠난다. 플레이어는 게임에 로그인할 때 마다 이 시퀀스를 반복한다.


실은 이 시퀀스 자체가 의도된 것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콜헨 여관 앞에서 게임을 시작하게 디자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여관 안에서 게임을 시작하고, 매일 듣던 음악을 듣고, 매일 만나던 티이를 만나도록 했다. 그리고 굳이 [떠난다] 버튼을 눌러 콜헨으로 진입하도록 설계했다.




IMG_0149.jpeg 프롤로그의 티이. 머리 색깔이 금발일 뿐, 티이의 무녀 복장이 모리안과 똑같은 것은 의도된 것이다.


티이는 콜헨의 무녀다. 자기 자신은 무녀의 재능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고, 가끔 여신의 신탁도 받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플레이어는 티이가 예언의 무녀이며, 그녀의 영혼이 에린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그녀는 모리안이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플레이어와 남자주인공인 카단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티이가 모리안이 되는 것을 막아보려 하지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미 돌기 시작했고, 플레이어는 티이가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결국 모리안이 된 티이의 인격은 소멸한다.


그리고 시즌1 엔딩을 마치고 플레이어가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플레이어는 적막과 마주한다. 로그인할 때 마다 들렸던, 아름답지만 지겨워진 그 멜로디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또한 티이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티이가 있었던 자리엔 아무도 없고, 대화 선택지도 없으며, 오직 [떠나기] 버튼만이 플레이어를 기다릴 뿐이다.


이 담담한 엔딩이 바로 내가 노렸던 것이었다. 나는 굳이 (아무도 없다) 같은 메시지를 쓰지 않았다. 나는 티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플레이어가 홀로 알아차리기를 바랬다. 티이가 없다는 것을 굳이 상기시켜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영원히 티이를 잃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온라인 게임 특유의 지속성이 깨어진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이 때, 개발팀은 여관의 BGM을 배포할 예정이었다. 늘 들었던 여관의 BGM은 이제부터는 게임 안에서는 들을 수 없다. 게임 밖에서만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배포된 파일을 본 플레이어는 한번 더 감성 충격을 받을 것이다. 여관 BGM의 제목은 '잊지 않을게요'이다. 이 '잊지 않을게요'는 티이에게 들었던 마지막 대사라는 걸 플레이어는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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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잊지 않으려 해도 이미 인격이 소멸해버린 티이는 플레이어와의 기억을 잊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모순 속에서, 이렇게 내가 의도한 '지속적인 월드의 완전한 상실'이 완성된다.




물론 이 실험에 성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충격과 반향이 있었고, 여전히 마영전 시즌1 엔딩은 플레이어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 같지만, 시즌1의 엔딩은 매출 증대나 플레이어 숫자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플레이어들은 마영전을 그만두기 시작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정서적 충격이 너무 컸는지 들리는 얘기론 시즌1 엔딩 후 플레이어는 급감했다고 한다. (나는 시즌 1 엔딩이 패치되기 전에 팀을 떠났다)


내가 떠난 후 개발팀은 예정에 없던, 티이를 대신할 수 있는 얼굴 마담을 급히 만들기도 하고 엔딩에 일부 수정을 가하기도 했다고 들었으니 사실 온라인 게임의 지속성에 도전해보겠다는 내 시도는 상업적으로는 오히려 실패에 가까운 결과로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이 엔딩이 발생시킨 예상치 못한 상업적 손실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옛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시즌1 라이브를 채 마치지 못하고 마영전 개발팀을 떠났다. 마영전팀을 떠난 다음엔 거의 10년 동안 어떠한 지면에서도 마영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타이틀의 성공에 누가 되거나, 옛 동료들의 성과에 무단승차하려는 것으로 보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가끔 이렇게 그 시절 얘기를 해볼까 한다. 벌써 15년이나 지난 예전 일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긴 답변을 끝냈을 때, 대답을 들은 학생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충분히 납득할만한 답을 들었다는 듯 학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맨 앞줄에 앉아 있었던 남학생이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진심으로 엉엉 울어버려서, 나는 꽤 당황했다. 이를 어떻게 달래지? 유머러스한 다른 재밌는 에피소드를 떠올리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하얀 로냐프강>을 보고 울었다는 독자들은 많이 만났는데, 내가 디자인한 게임 때문에 누군가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혹시 그 학생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다면, 비슷한 개발 에피소드 몇개를 링크한다.




https://blog.naver.com/iyooha/222585913913

https://blog.naver.com/iyooha/223122409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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