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설 3화) 시후의 초등학교 입학

by 피닉스
사진출처: 네이버

"아기엄마 치료받고 계신데요 왜요?" 치료사가 말했다. "아. 그래요?" 하며 안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료실은 15개 정도의 의료기 침대가 일렬로 있었고 커튼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커튼을 젖히며 "아기 이리 주세요. 제 머리맡에 앉혀두고 붙잡고 치료받을게요." 했더니 "아니요. 괜찮아요." 하며 미안해하는 걸 몇 번을 달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건네주고 갔다. 가끔씩 어느 사람과 눈빛을 교환하며 대화하지 않아도 신기하게도 그 사람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 때가 있다. 그 원무과 직원은 물리치료를 받는다는 핑계로 아기를 맡기고 내가 몰래 도망이라도 친 줄 알고 놀라서 뛰어왔다가 내가 치료를 받고 있으니 멋쩍은 표정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커튼이 가로막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녀의 안도하는 표정이 선연히 그려졌다.

6개월인 시후는 척추에 힘이 없는지 아직 제대로 앉지도 못했기에 배 위에 눕힌 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시후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오뚝한 코, 뚜렷한 갈매기 눈썹, 앵두 같은 입술 생김새만 놓고 보면 딸이 더 어울릴법한 완벽한 이목구비를 자랑했다. 어딜 가나 인기 만점이었고 비슷한 또래의 아기엄마들은 아들인데 딸인 우리 아기보다 더 예쁘다고까지 했다. 그런 감탄과 칭찬이 쏟아지면 내가 시후를 낳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 짝이 없었다.


돌이 가까워지면서 시후는 낯을 많이 가려 엄마 아빠 외에 다른 사람이 쳐다보는 것도 부담스러워했고 안아보려고 하면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울었다. 미용실에도 머리 깎는 면도기 소리에 기겁을 하고 우는 바람에 입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꺼내느라 애를 먹은 후로는 미용실을 가는 것은 아예 엄두를 못 냈다. 집에서 머리를 깎아주다 보니 거의 미용사 버금가는 실력자가 되었다.


시후는 면역이 약한 탓인지 늘 감기로 인해 병원과 약을 달고 살았다. 항상 같은 소아과를 다녔기에 적응할 법도 한데 한결같이 칭얼대고 병원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그 때문에 소아과 의사로부터 " 시후 엄마 다른 병원에 한번 데려가 보세요." 무슨 과로 가야 할까요? " "정신과에 가야죠." 30대의 젊은 여의사는 본인도 의사 이전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일 텐데 아이가 좀 칭얼대고 울었기로서니 정신과를 가라니 참 말을 함부로 한다 싶어 그날부터 그 의사가 얄밉게 보였다. 갓난아기 때부터 네 살이 된 그 시점까지 거의 매일 드나든 단골 환자한테 말이다. 어쩌면 단골 환자이니 그런 소리도 스스럼없이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그 의사가 고마운 건 시후가 네 살 때 걸렸던 가와사키를 사흘 만에 알아채고 대학병원에 가라는 신속한 대처를 해 주신 덕분에 완치를 할 수 있었던 점이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평생 무시무시한 심장합병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후에 알고 아찔했었다.


돌 무렵부터 시후는 눈동자가 흐릿해질 때가 잦았다. 특히 잠이 올 때는 눈이 흐릿해지면서 초점 없는 멍한 눈빛으로 변했고 평소에도 아이답지 않게 눈빛이 탁하고 풀려있을 때가 많았다. "애가 사람을 보는 눈질이 좀 안 좋다." 며 아버지한테 몰래 말씀하시는걸 내가 듣고 말았다. "엄마 시후 눈빛이 흐리지요?" 하고 되물으니 내게 상처될까 봐 더 이상 입을 다무셨다. 그 무렵부터 입원 중 링거를 맞을 때는 눈빛이 해롱해롱 해져 약기운 때문이라 생각하면서도 은근 걱정스러웠다. 아마도 이때부터 정신적인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정신질환자는 눈빛부터 다르다. 초점이 잘 맞지 않고 멍하면서 사차원세계를 사는 사람 같다. 당시도 좀 의심스러웠지만 후에 돌이켜 보면 유전적인 요인으로 뇌신경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보통의 아이들과 좀 다름을 느꼈다. 입원 시 그런 말을 의사에게 상담해도 별다른 말이 없어 찜찜했지만 큰 병이 아닌가 보다 하며 넘어갔다. 난시 증상도 있었으나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엄마인 나는 느낄 수 있는데 의사들은 그 미세한 부분을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기였을 때부터 사물을 볼 때 곁눈질을 곧잘 했고 한 번은 사물과의 거리감각이 없어 벽에 머리를 부딪혀 박이 터진 적이 있었다. 자지러질 듯 울다가 "엄마 나 안 죽어요?" "그럼 시후는 안 죽어. 이미 다 나았어." "엄마 나 안 죽어요?" "시후는 안 죽으니까 걱정 마." "엄마 나 정말 안 죽는 거지요?" "그래 시후야 우리 시후 엄마가 안 죽게 고쳐줄게. 걱정 안 해도 돼."

죽음이 뭔지도 모를 나이인 네 살짜리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겁이 많은 시후는 극도로 무서운 상황에 맞닥뜨리면 항상 같은 내용의 질문을 세 번씩하고 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시후의 성격은 단순히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것을 떠나 극도로 예민하고 겁이 많았고 분리불안증이 심한 아이였다. 유치원 발표회에도 무대공포증으로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한창 무르익은 분위기를 망칠까 봐 다른 아이들과 학부모들한테 피해를 안 주려고 서둘러 데리고 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 유치원에서 나서기 전 선생님이 조용히 다가와 연습할 때는 무대에도 잘 오르고 공연도 적극적으로 잘했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으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집으로 오는 내내 속상해서 다른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도 아랑곳 않고 재롱을 잘도 부리는데 너는 뭐가 못나서 못하냐며 시후한테 화풀이를 했다. 그래도 인근 대학교 강당을 대여해 개최한 가을 운동회 때는 공 굴리기, 달리기, 과자 따먹기 등 놀이에 곧잘 참여해 한 시름 놓았으나 숫기 없는 성격은 초등학교를 들어가서도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후 같은 반 학부모끼리 서로 얼굴도 익힐 겸 아이를 동반한 모임을 한번 가진 적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낯가림도 없이 서로 금방 친해졌고 후에 길에서 만나면 안녕하세요? 저 "시후 친구 정민이예요." 하며 스스럼없이 살갑게 다가오는 아이들이 내 아이처럼 예쁘고 사랑스럽고 또 부러웠다. 시후는 사내아이 특유의 과격함이나 장난기도 없었고 늘 있는 듯 없는 듯 말 잘 듣는 아이였다.


우리 부부는 야식집인 족발집을 운영하는 만큼 늘 잠이 부족했고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시후랑 놀아주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은 마음에 공원도 자주 가고 외식도 자주 하는 편이었다.


한 시간 거리의 식물원이나 동물원에 갈 때면 아침부터 부산히 움직였다. 우리 가족들은 주로 식물원이나 동물원 관람을 좋아했다. 관람을 끝낸 후에는 넓은 잔디에 드문드문 울창한 활엽수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 나무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준비해 간 김밥이며 빵, 과일 등 간식을 즐겼다. 신선한 공기, 맑고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사방에 퍼진 꽃향기에 몸을 내맡길 때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금붕어가 한가로이 노니는 연못에 가면 미리 준비해 간 새우깡을 뿌리며 즐거워하는 시후의 해맑은 웃음소리로 연못을 가득 채우기도 했다.

새우깡을 부숴 던지면 몇 미터 거리에 있던 금붕어들도 눈 깜짝할 새에 몰려드는 모습이 실로 장관이었다. 공원에 올 때는 주로 김밥 통닭을 사 오고 외식을 갈 때는 야외활동은 삼갔다. 두 군데를 들리기엔 영업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물고기한테 "다음에 보자" 인사하고 집에 가자.

"물고기야 담에 봐" 하는 시후의 인사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편은 다 큰 아이한테 유아틱 한 인사말 시키냐며 표독스럽게 고함을 질렀다. "초등학교 1학년이면 유치원 졸업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유아틱 한 인사한다고 어디 큰 일라도 나는 거야?" 하면 얼굴이 시뻘겋게 토라져 말을 안 하는 모습에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 남편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아이에게 나이에 맞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실수를 인정했다.

또 그렇게 시킨다고 대뜸 받아서 물고기에게 전하는 시후의 순수함에 마음이 환해지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시후가 맑고 순수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가끔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 아니 실수라는 이름을 굳이 붙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시후가 한해 한해 탈없이 자라 주는 게 감사했지만 가끔씩 성장해 가는 아이와 같은 박자로 순수함이 퇴색해 가는 것 같아 아쉽고 안타까워 세월을 붙잡고 싶을 때가 많았다. 사진 속에 박제된 장면처럼 조금이라도 어린 시절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 동심 속으로 돌아가고픈 그 옛날 나의 어린 시절을 시후로 인해 반영하고픈 내 마음의 표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수유기 때는 "우유만 떼면 편하겠지. 걸음마를 못할 땐 걷기 시작하면 고삐 풀린 망아지라 잡으러 다니는 수고와 고충은 있어도 종일 업고 안고 살아야 하는 고통에서 벗어나지겠지. 학교 들어가면 그야말로 지옥탈출이겠지." 고대했지만 기대와 실망 속에 그 시기에 맞는 돌봄은 늘 기다리고 있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시후는 학교생활도 그럭저럭 적응도 했고 성적이 크게 우수하지는 못해도 상위권에는 들었다. 반에서 1.2등을 하면 선생님 사랑도 듬뿍 받고 아이들한테도 인기가 많고 좋겠지만 공부는 크게 뒤처짐 없이 그저 건강하고 그 나이대마다 좋은 추억 쌓기를 하며 행복한 일상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려서 병치레도 잦았고 밤낮이 바뀐 시후지만 낮잠도 깊이 못 자는 시후의 돌봄으로 늘 부족한 잠으로 보낸 세월이 수년이라 자식이라곤 시후 하나지만 여느 집 아이 둘을 키운 것과 맞먹는 강도의 고단한 세월을 건너와서인지 이런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평화로운 일상이 그저 행복이라 여겼다.


여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인 시후가 어느 날은 방과 후에 친구를 한 명씩 데리고 와서 놀 때도 있고 대여섯 명씩 무더기로 데리고 올 때도 있었다. 사교성과 대인관계가 뒤떨어진다고 생각했기에 시후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 흐뭇했다.

저학년 때는 오전수업이라 급식을 안 먹고 오기에 정성껏 점심 밥상을 차려주고 간식을 챙겨주면 하나도 안 남기고 먹는 아이들이 내 자식처럼 예뻐 뭐라도 더 챙겨 주고 즐겁게 노라고 했다. 주로 유희왕 카드놀이를 하다 아파트 놀이트에 나가 놀고 헤어지곤 했다. 오후 다섯 시경이면 일찌감치 시후의 저녁을 챙겨주고 가게에 출근했다. 남편은 낮에 출근해 배달을 몇 탕 뛸 때도 있고 아르바이트생과 준비작업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4화에서 계속..)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02화(#소설 2화) 축복으로 온 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