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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1화) 귀신을 물리치다.

시후의 공연 그리고 취업

by 피닉스

굿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후반을 향해 치닫는 시점에 곁에 있던 굿당 보살이 "조상신 노자돈 좀 놔라."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신한테 노자돈이 무슨 소용인가? 다 자기네들이 가져갈 거면서 속보인다는 생각에 오만권이 아닌 만 원권 두장을 올려놓았다. 대나무를 흔들며 뛰고 굴리고 혼을 빼놓는 의식을 치르던 무당할머니가 그 돈을 순식간에 낚아채더니 "시후야. 내손자 시후야. 내가 네 할미다. 옛다. 맛있는 것 사 먹고 기다려라. 할미가 네 병 고쳐주마." 하며 시후 손에 쥐어 주는 게 아닌가? "시후는 엉겁결에 돈을 받아 쥐며 "감사합니다." 하며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 짧은 순간 '아. 저 무당은 노잣돈을 핑계 삼아 돈만 밝히는 여느 무당과는 달리 진심으로 시후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시는구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감동의 눈물이 쏟아졌다. 옆에 앉아있던 남편도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있었다. 이럴걸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 온 휴지를 슬그머니 건넸다. 또다시 그 무당이 시후에게 다가오더니 "우리 손자 노래 잘하지. 오늘 시후가 부르는 노래 꼭 듣고 떠나야겠다. 한곡 뽑아 보거라. 약간 긴장한 듯했지만 성큼성큼 한복판으로 걸어 나갔다. 원래 굿당에 비치돼 있었던 건지 시후를 위해 별도로 준비한 건지는 모르지만 누군가가 마이크를 시후에게 안겼다. 나는 혹시라도 시후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와 분위기 깰까 봐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숨죽이고 있었다.


곧이어 시후의 입에서 구슬프면서도 청아한 트롯곡조가 흘러나오자 웅성거리던 좌중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모두들 넋을 잃고 천상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박진석'의 '천년을 빌려준다면'이었다. 가사 중 "만약에 하늘이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준다면 그 천년을 당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 쓰겠소."에 나오는 '당신'이란 단어를 '부모'로 바꿔 불러 우리 부부와 굿당 관계자, 무당, 법사님, 보살님 등 그 자리에 참석한 20여 명을 감동의 도가니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앙코르를 외쳤고 앙코르곡 '김조한'의 '사랑에 빠지고 싶다'로 또 한 번 굿당이 후끈 달아오르며 눈물바다로 출렁거렸다. 마지막으로 영가들에게 옷을 입혀 보내고 태우는 의식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일생일대의 요란했던 굿이 끝나고 하루가 지나도 별 변화가 없어 또 비싼 떡 사 먹었구나. 이제 이 짓도 한번 해 봤으면 백번을 하나 천 번을 똑같을 테니 더 이상 속지 말고 운명에 맡겨야겠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사이 무당할머니한테서 전화가 와서 시후 좀 어떠냐고 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하자 서서히 귀신이 빠져가가게 되어 있으니 더 기다려 보라며 남편보고 오늘 시간 내어 점집으로 한번 들러라고 하셨다. 점집을 찾아간 남편이 우황청심환을 한통 사들고 왔다. 할머니가 10만 원이 든 봉투를 주면서 약국에 가서 우황청심환을 사다 먹이라 했다는 것이다. 무당들이 굿을 하기 전에는 온갖 아부를 다하다가 굿이 끝나면 입을 싹 닦는다고 들었는데 그 할머니는 나름 AS까지 해주시니 정이 넘치고 의리가 남다른 분이라는 생각에 믿어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허사로 끝나겠지 하는 낙담이 더 크게 밀려왔다.


그분 말씀처럼 나도 귀신이 든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그 첫 번째 증거고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을 못 하는 게 두 번째 증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목숨까지 위협받을 만큼 과격한 기습공격을 수없이 당해왔다. 또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까지 출동하는 전쟁 아닌 전쟁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정신병은 둘째치고 귀신만 빼내도 우리 가족에게 광명이 비치는 날이라 생각했던 터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시후의 중얼거림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사이 우리가 굿을 한 사실을 알고 계신 손윗동서가 시후는 어떠냐고 안부전화를 해왔다. "형님 아무래도 이번에도 틀린 것 같아요." "그래? 내가 가는 점집에 물어보고 다시 전화할게."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형님은 해마다 신수를 보는 것은 기본이고 크고 작은 집안의 행사나 이사를 앞두고도 점집에 가는 그야말로 무속인 신봉자였다. " 동서 그 증상이 단번에 끊어지는 게 아니라 서서히 물러간다니까 느긋한 마음으로 한 달 정도 기다려보자." "네" 성질 급한 동서는 곧바로 전화로 알려주었고 나는 속으로 "귀신이 나가면 바로 증상이 없어져야지. 서서히 물러가는 건 또 뭐람." 하는 생각에 시큰둥하고 힘없는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 일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차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엄마. 정말로 귀신이 서서히 물러가는 것 같아요." "뭐? 어..? 그러고 보니 어제도 오늘도 중얼거림이 없어졌네." 아직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닌데 횟수가 많이 줄었어요. 남아있는 귀신도 힘이 약해진 게 느껴져요." 뛸 듯이 기뻤다. "하나님 조상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고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그 일이 있고 3일 후 중얼거림 증세가 완전히 사라졌다. 굿을 한 지 2주 만이었다. "니나노 릴리야 릴리야..." 민요로 목청을 돋우며 민속춤 한판으로 즉석공연을 펼치고 둘이 안고 "우리 시후 몸에서 귀신이 도망갔다아아"소리 지르며 웃고 생 난리 부르스를 췄다.

기쁜 마음에 가게로 달려가 남편한테 알렸더니 입이 귀에 걸리고 일하는 내내 날아다니는 게 눈에 보였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오토바이도 그런 우리 가족을 축복하는 듯 그날따라 도로의 막힘도 없이 춤을 추듯 상쾌한 소리음으로 리드미컬하게 미끄러져가더라는 것이다.


귀신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그동안 집요하게 괴롭히던 귀신이 빠져나가니 살 것 같았다. 사악한 귀신의 괴롭힘에 비하면 조현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질병으로 고통에 젖어있는 우리 가족에게 신이 몇 배의 시련을 주어 웬만한 질병쯤은 거뜬히 견딜 수 있는 능력과 깨달음을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의 몸에 발병하는 질병 중 특히 정신질환은 기분과 상당 부분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는 날이었다. 같은 강도의 질병이라도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기분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라도 매사에 비관적이고 우울감에 젖어있는 사람에게 10의 강도로 덮치면 그대로 고스란히 10의 강도로 느껴지는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긍정적이고 산뜻한 기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5나 3의 강도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시후도 병을 살살 달래고 친구로 지내면서 가해지는 고통의 농도를 옅게 희석시킬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다른 일이나 취미에 몰두하면서 그 질병에 대해 잊고 지내는 시간을 늘려갔다. 어느 순간 그 병에 젖어있지 않으면 병이 있어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가는데 어떤 병이 꼭 장애물이 되는 것만은 분명 아니었다.

시후에게도 평소 나의 세뇌가 먹혀 더 이상 조현병, 강박증, 틱장애, 공황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의 기분이나 미세한 상대의 반응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긴장한다. 그게 정신병에 걸릴 수 있는 취약점이고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족쇄로 채워진다.

"엄마, 저 오늘 공연가요. " "공연이라니?" "저번주에 "노래봉사"밴드에 가입했어요. 멤버는 20명 정도 되고 악기 다루는 사람과 노래하는 사람끼리 월 1회 복지센터와 장애인센터에 공연하는 동아리예요." "그래? 너는 오늘 처음이니?" "네 제가 기타 치고 노래하는 씽어예요." "몇 군데 가니?" "두 곳요." "그래. 장하다 내 아들 잘 다녀와."

불과 한 달 전에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그동안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지내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취미나 봉사 동아리를 알아보라고 권했는데 허투루 듣지 않고 밴드를 물색해 본 듯했다. 시후는 봉사활동과 학과공부에도 무리 없이 잘 적응했다. 이제는 조현병 증세도 많이 호전되었고 틱과 공황장애는 나타나지 않은지 한참 되었다. 컨디션이 조금 나쁘면 그에 맞춰 쉬어가고 스스로 조율이 가능해졌다.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니 조현병을 그렇게 요란스럽게 앓았던 아이였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또래 친구들이 대학을 입학했던 이듬해에 시후는 졸업을 했다.


"엄마 아빠, 저 복지사로 취업했어요."

"그래? 어디에"

" ○○복지센터요. 저번주에 면접 봤는데 오늘 연락 왔어요. 낼부터 출근하래요."

"장하다. 내 아들. 오늘 저녁에 우리 가게에서 맥주 파티하자." "엄마 아빠, 그동안 배은망덕한 짓 일삼아도 언제나 제 편 되어 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내 아들 시후는 비록 조현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질병 때문에 세상을 다 잃은 듯 우울해하거나 굴하지 않을 것이다. 희망찬 내일을 향해 시후만의 방향과 속도로 그러나 멈추지 않고 걸어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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