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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날리네

두 번째 싱글 음원을 내며

by 김태진

진촌리에 살던 시절 조급하고 답답해지면 언제 퍼져도 이상하지 않은 낡은 차에 몸을 싣고 시골길을 달렸다. 장을 보러 시내에 나가려면 20분 이상 운전해야 하는 시골이었는데 38번 국도 양쪽으로 늘어선 농가와 논밭, 아늑한 금광호수는 그 시절 언제나 위로가 되었다. 여느 외곽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풍경이었지만 나에겐 그 장소가 그 시절이고 그 시절이 곧 그 장소가 되어 봄이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시큰한 마음보다 그리움이 앞선 걸 보면 시간이 꽤 흘렀나 보다.


“가을여행”에 이어 추억 속에서 노래 하나를 꺼낸다. 스물아홉, 음악을 하겠다며 만학도가 된 나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작곡이라는 분야가 대학을 졸업한다고 취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취업을 위해 진학한 것도 아니었지만 진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분야의 음악을 하고 싶은지, 그런 아티스트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생계를 꾸릴 만큼 벌 수 있는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때론 나보다 한참 어린 동기들이 부러웠다. 당시 내게는 실패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늘 절실했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그곳에서의 마지막 봄이 되었고 그날도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려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를 나섰다. 나의 불안한 마음과 대조되듯 길게 뻗은 벚꽃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긴 겨울 끝, 바람에서 봄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꽃잎이 만개할 때 즈음 이 곡이 발매되길 바랐는데 계절의 변화는 꽤 갑작스럽다. 여러 보컬에게 이 곡을 맡겨보았지만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형우 쌤의 “그대를 사랑하는데” 앨범을 듣던 중 이 곡의 주인을 찾았다는 생각이 번뜩였다. 그의 청량한 목소리는 꽃잎이 날리는 도로 위를 달리듯 시원했다. 형우 쌤은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려는 나에게 중요한 조언을 해준 은인이다. 군 제대 후 음악을 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으로 찾아갔던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만난 그가 말했다. “술, 담배 하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히 살면 절대 늦은 나이가 아니야.” 별 뜻 없는 얘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 한 마디가 희망이 되었다. 이제 나는 작곡가가 됐고 오랜 인연과 함께 작업을 하게 돼 감회가 새롭다.


이번 음원을 준비하며 여러 고민이 있었는데 그중 스트링(현악기) 세션 녹음에 대해서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 봄의 따뜻함에 시원한 느낌을 더하기 위해 스트링을 편곡에 넣었지만 막상 개인 음원을 위해 녹음하려니 무척 망설여졌다. 가장 큰 이유는 적지 않은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인디 싱어송라이터의 음악 편성이 크지 않은 데에는 이런 금전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가상악기를 이용해 미디 프로그래밍으로 대체하는 쉬운 방법도 있었으나 음원의 퀄리티를 생각했을 때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았다. 나는 오케스트레이션을 비롯한 큰 편성의 영상 음악을 주로 했기 때문에 음악적 구상이 대체로 큰 편이다. 게다가 드라마 음악을 하며 스트링 녹음을 수없이 했기 때문에 실녹음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서울스투디오에 가요 스트링 녹음 일정이 있는 날, 목록 사이에 내 곡을 끼워 넣었다. 수없이 들락거리던 스튜디오였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초조하게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본 엔지니어 형이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걸 눈치챘나 보다. “난 네가 로또라도 당첨된 줄 알았어.” 긴장을 풀어주려는 농담이었겠지만 사실 개인 음원을 위해 14인조 스트링 세션을 녹음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녹음 후 악장님도 같은 얘기를 했다. 개인 음원을 위해 혼자 제작, 작곡, 편곡, 디렉팅까지 다 하는 경우는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고.


이번 곡을 위해 최근 한 방송에서 만난 기타리스트도 섭외했다. 그는 기타리스트이자 가수로 이미 많은 팬을 보유한 연예인이기도 하다. 첫인상이 좋아 호기심에 섭외했는데 처음으로 함께하는 작업이라 기대만큼 걱정도 됐다. 그동안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작업을 할 때 자주 협업했던 기타리스트가 실력도 좋고 익숙했지만 내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기로 했다. 이런 결정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나는 이번 음원들이 발매되고 나면(“꽃잎 날리네” “5월 이야기”를 동시에 제작했다) 표현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 녹음, 믹싱, 마스터링 같은 기본적인 과정을 제외하고도 14인조 스트링 세션을 비롯해, 기타, 아코디언, 코러스 등 여러 연주자를 섭외한 만큼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들인 프로젝트였다. 들인 정성만큼 마음의 무게가 기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기대감이 보답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이왕 돈을 들여 음원을 만드는데 음악인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얻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자주 협업했던 사람이 아닌 새로운 뮤지션을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녹음 과정이 즐겁고 유쾌하길 바랐다.


오래전 내가 만든 곡을 다시 듣다 보면 그 음원을 제작하던 때의 감정과 기억이 떠오른다. 마치 특정 향수의 냄새를 맡으면 그 향수를 한창 애용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르듯 말이다. 사람들은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지만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에 추억을 남긴다. 추억뿐이 아니다. 남겨진 음원에는 나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훗날 “꽃잎 날리네”를 들으면 어떤 감정이 되살아날까? 오랜 추억 속에서 꺼낸 곡인 만큼 봄이면 행복한 향기를 진하게 머금고 있길 바란다.


“5월 이야기”는 4월 30일에 발매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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