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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Nov 02. 2023

인노첸시오 8세와 마녀재판

무속의 성행과 마녀재판

가만히 앉아서 된 교황: 왕권신수설     

  식스토 4세가 사망하고 로마에서는 폭동이 발생했다. 전임교황의 독재와 축재에 따른 반발인지, 폭도들이 교황의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노의 궁전과 곡물창고를 습격했다. 이러한 혼란으로 새 교황을 뽑기 위한 콘클라베는 교황 사후 14일이나 지나서 열렸고, 전임교황의 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의 율리오 2세)추기경은 자신이 선출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꼭두각시를 교황으로 만들기 위해 무색무취한 조반니 바티스타 치보 추기경을 추천했고, 스페인 출신의 보스인 보르지아 추기경의 지지를 얻어 내었다. 그 결과 조반니 추기경이 인노첸시오 8세 교황으로 등극했다. 가만히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교황자리가 내려온 것이다. 왕권신수설이 맞는 것 같다.      

  꼭두각시역할을 충실히 수행

  새 교황은 제노바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파도바와 로마에서 공부한 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467년에 사보나의 주교가 되었고. 성직매매로 얼룩진 식스토 4세에 의해 1473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키도 크고 잘 생겨 아바타로 내세우기는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우유부단하고 자기주장이 없어 사람들이 바보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가 완전히 무식하지 않다.”는 기록<문명이야기 5-2> 이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인노첸시오 8세는 자기를 뽑아준 사람들의 의도에 충실하게 교황직을 수행했다. 자기의견을 고집하기보다 로베레 추기경 등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물질적 향락을 고민 없이 즐겼다. 추대 세력들이 원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문재인 전대통령이 연상된다. 교황은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사제가 되기 전에 낳았고, 성직자가 된 뒤에는 독신생활을 유지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바티칸 궁에서 자녀들과 손주들의 결혼식을 올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다. 

  외교 정책은 피렌체에 맡겼다. 인노첸시오 8세는 1488년 1월에 자신의 아들 프란체스케토 치보를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과 결혼시켜 피렌체와 동맹을 맺고, 외교정책을 경험 많은 로렌초에게 의존했다. 로렌초의 13세 된 아들 조반니(훗날의 교황 레오 10세)를 추기경으로 서임하고 거액의 대출도 받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의 재임기간에 이탈리아는 평화를 누렸다. 국제 관계도 유리하게 돌아갔다.     

 오스만 제국의 왕자 인질과 평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죽자, 바예지드 2세와 그 동생인 젬이 술탄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패배한 젬이 로도스 섬의 요한기사단에 망명을 하자,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드 2세가 그의 잠재적 경쟁자인 젬 왕자를 감금하는 대가로 매년 4만 5천두카트를 주기로 약속했다. 1두카트에 10만원으로 계산하더라도 45억원이나 되는 큰돈이었다. 요한기사단은 이렇게 비싼 인질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로마로 보냈다. 일설에는 입찰을 했는데 교황이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기사단 단장은 추기경자리를 받았다고 한다. 이 수익성 높은 인질은 유럽의 평화를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위협할 수 있는 인질을 갖게 되어 십자군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바예지드 2세는 전쟁을 통한 확장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아버지 메흐메트 2세의 오랜 정복전쟁으로 백성들이 많이 지쳐 있었고, 동생 젬이 서구 제국과 힘을 합쳐 투르크를 침공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 같다.  

  교회쇄신 부재와 타락

  문제는 인노첸시오 교황이 교회 쇄신을 하지 않은 것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고 시대 풍조에 순응하는 사람이라 사치스러웠다. 추기경들도 돈을 주고 된 사람이 많아 부정부패가 심했다. 술탄으로부터 인질 보호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임자에게 물려받은 빚에다, 사치스럽고 부패했으니 교황청의 재정 상태가 좋을 수 없었다.     

  교황은 재정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 만든 교회 관직을 입찰에 붙여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팔았다. 관직을 매입한 관리들도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특별사면 교서나 면죄부를 위조해서 팔았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째서 정의가 구현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어떤 추기경은 “하느님은 죄인이 죽기를 원하지 않고 돈을 내고 살기를 바라신다” 고 답했다 한다<문명이야기 5-2>.      

  교회가 돈을 원하다 보니 타락이 가속화되었다. 교황청의 주요 보직은 돈 있는 사람들로 채워졌고, 윗물이 탁하니 아랫물도 흐려졌다. 돈을 잘 모으고 뇌물 잘 주는 사람이 발탁되는 잘못된 인센티브가 작동했고 지역교구의 사제들도 출세하려면 돈을 마련해야 했다. 교회본연의 임무인 영적·도덕적 교화 및 교회 개혁은 망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상층의 무질서는 사회전체의 도덕성을 떨어뜨렸다. 폭력, 도둑질, 강간 등이 일상화되어, 도로변에 지난밤 살해된 남자의 시체가 자주 눈에 띄었다. 로마를 방문하던 순례자들과 대사들이 길에서 노상강도를 만나 발가벗겨지곤 했다<문명이아기 5-2>.    

지식인 사이에서는 종교적 회의주의가 널리 퍼졌고 아랍철학자 아베로에스를 따라 개인의 불멸성이 아니라 세계영혼만이 불멸이라고 외쳤다. 이는 정통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일부 성직자(피렌체의 사보나롤라)는 종말론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무속의 성행과 마녀재판

 정통신앙이 흔들리고 제도권 종교가 돈만 밝히는 가운데, 사람들은 우리의 무속인에 해당하는 마녀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될수록 무속인이 늘어나는데, 불안한 사람들이 이들에게서 위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당시 마법을 행한다고 스스로 믿거나 마녀를 믿는 사람들이 북부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브레시아 근처 평원에서 열린 마녀들의 행사에 2만5천명이 모였다고 한다<문명이야기 5-2>. 1484년 인노첸시오 교황은 마녀(무속인)들을 경계하는 교서를 내렸다. 마녀들에게 의존하는 일을 금지하면서 폭풍과 질병 일부를 그들의 탓으로 돌렸고, 종교재판관들에 대해 빈틈없이 경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교황이 마법의 현존과 효능을 인정했으니 그에 대한 믿음을 오히려 강화시켰을 것 같다. 1485년에 북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호수 도시 코모에서 41명의 여자들이 마녀로 화형을 당했다. 1510년에 브레시아에서 140명이, 1514년에 코모에서 300명이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문명이야기 5-2, P248>.

  고등종교와 무속의 차이는 도덕적 고양을 할 수 있느냐에 있는 것 같다. 기독교는 사랑으로, 불교는 보살행으로 인간을 도덕적으로 승화시킨다. 사랑하고 서로 돕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행복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속은 대단히 인간적이다. 부적 등 처방을 통해 신과 거래를 한다. 개인적인 위안은 얻을 수 있겠지만 사회전체의 신뢰나 행복을 기대하기 힘들다. 오히려 무속인이 민중을 속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할 수 있다. 물론 고등종교도 돈과 제사로 신을 매수하려 한다면 무속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표현의 자유와 혹세무민

요즘 점과 무속행위가 유튜브 등 통신망을 통해 빨리 퍼지고 있다. 특히 무속인의 예언이 일종의 선거지원이 되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모양새다. 자신의 신통력을 광고하려는지 현 정부의 몰락을 예언하는 무속인까지 나오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 너무하다. 그 폐해가 참으로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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