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다
2023년 3월.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외투를 여미게 하지만, 남쪽 어디선가 실려 온 봄 내음이 코끝을 스치며 마음을 간질인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 마음이 설렌다. 이제 봄꽃 보러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2020년 2월, 느닷없이 우리 삶에 들이닥친 코로나 팬데믹은 공포와 불안을 가져왔고, 서로 간의 왕래와 소통을 단절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포와 불안은 희석되었으나 우리의 일상은 지루하고 무료해졌으며 짙은 피로감만이 쌓여갔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설렘조차 잊어버린 채 우리는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2022년 3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거리 두기가 막바지에 다다르던 때였다. 답답했던 일상을 벗어나 우리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봄을 마중하기 위해 떠나는 봄꽃 여행을.
이른 3월부터 여수 오동도의 동백꽃을 시작으로 광양 매화축제, 이천 산수유축제 그리고 4월, 진해 벚꽃축제와 비슬산 참꽃 축제까지 우리는 부지런히 꽃구경하러 다녔다. 마치 봄꽃 축제 도장 깨기라도 하듯 말이다.
남편이 봄꽃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사실 꽃구경을 위해 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것은 시간 낭비 돈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꽃이라면 집 앞 공원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 봄의 쌀쌀한 바람 속에서 막 피어나는 여린 꽃을 보며 봄을 맞이하는 즐거움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고 멋진 경험이었다.
두 달 동안 전국 여러 곳을 다녔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진해의 벚꽃 여행을 떠올릴 것이다.
벚나무는 가로수로 많이 심는 수종이라 꽃이 일제히 피면 아름답지만, ‘봄’ 하면 ‘벚꽃’이라는 식상한 수식어 때문에 내게 벚꽃은 그저 봄이 오면 피고 지는 꽃 중에 하나로 특별한 감흥을 주진 않았다. 더구나 사람 많은 곳과 번잡스러움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벚꽃 명소를 찾아갈 생각도 없었고, 집 근처 공원을 오가며 한두 번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진해로 가서 마주한 벚꽃은 달랐다. 그곳의 벚꽃은 그저 피고 지는 봄의 꽃이 아니라, 나에게 봄의 특별한 순간을 선사하는 꽃임을 깨닫게 했다.
매년 봄마다 ‘진해 군항제’ 소식과 함께 ‘몇만 명이 다녀갔다’는 뉴스를 들으며 냉소적이었던 내가, 그 진해의 벚꽃 터널 아래에 서니 가슴 가득 차오르는 환희와 설렘은 상상 이상이었다. 흩날리는 연분홍 꽃비를 맞으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 손을 꼭 잡고 길을 걷는 연인들,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봄꽃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비로소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유로움과 설렘, 그리고 유한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회전목마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여행은, 우리를 그 익숙함에서 잠시 내리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멈춰 서서 삶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선사하는 것 같다. 여행을 통해 나는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예전에는 어르신들이 계절마다 꽃구경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며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어쩌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도 그들의 설렘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 야단법석에 동참하고 싶어 마음이 들썩이곤 한다.
인생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누구도 가는 순서를 정할 수 없는 이 길 위에서, 과연 내년에도 이렇게 찬란한 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또다시 피어나는 꽃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문득, 어르신들에겐 그 꽃을 바라보는 짧은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날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다음 주에는 친정을 내려간다. 부모님을 모시고 포항이나 경주로 봄나들이 다녀올까 한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지만, 부모님께 올해 가장 아름다운 봄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