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낭독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서울에서 대구로 전학을 왔다. 낯선 방언과 환경 속에서 책을 읽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유독 나를 주목하는 게 느껴졌다.
국어 시간에 소리내어 읽어야 할 때면 나는 더욱 긴장되었다. 선생님이 한 명씩 돌려가며 책을 읽혔는데 내 차례가 오면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오르고, 아이들의 시선이 따갑게 나를 스치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순간 목소리가 떨리고, 내가 지금 무언가 잘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아서 읽기는 계속 이어졌고 아이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난처했다. 낭독하면 떠오르는 기억이다. 나는 낭독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앞에는 소리 내어 읽기를 싫어하고 앞에 나서기라도 하려면 쭈볏쭈볏 하는 것이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다. 그래서인지 남 앞에 나설 일이 있으면 며칠 전부터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뛰기 시작하고 긴장을 한다.
어린 시절의 낭독이 그렇게 부담이 되었기에, 지금도 낭독의 순간이 오면 어딘가 긴장되는 것 같다. 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줬지만 책읽기 봉사활동 같은 것도 신청하지 못했다. 아이들 앞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합평 시간에 글을 소리 내어 읽을 때도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낭독을 잘하는 사람이 부럽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도서관 글쓰기 수업 마지막 날에는 <작은 낭독회>로 작가처럼 앞에 나가서 글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진다. 몇 번 그런 자리를 가져봤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낭독하면 투명한 유리잔에 맑은 물이 채워지듯 맑고 고요하게 읽어야 하지만 눈으로 읽는 것과 소리 내어 읽는 것과의 차이는 확연했다. 잘 읽지 못해도 내 목소리가 귀를 통과하는 순간 그 글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쓴 글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면 어쩔 수 없이 낭독을 하게 된다. 글쓰기와 낭독은 실과 바늘처럼 서로를 얽어매고 있는 사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이 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올 때, 그 글은 책 속에 머물렀던 때와는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내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면 글이 주는 울림과 감정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내가 작가가 된다면 낭독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글쓰기를 열심히 하고 싶다.
비대면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어느 책에서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마음껏 슬퍼하는 일이라는 구절을 마주했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마음껏 슬퍼한 순간이 있었나 싶다. 바쁜 생활을 탓해보기도 하지만 그만큼 감정이 무뎌졌다는 생각이 든다. 슬퍼하는 순간이 오면 그 슬픔에 젖어 슬퍼하기보다 회피하기 바빴다. 슬픔과 마주하는 일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온전한 내가 되는 일 같다. 작가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글쓰기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나 생각해보니 내 안에 있는 뭔가를 풀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내가 맞는지 깊이 사유할 시간을 갖지 못하다가 글쓰기를 하면 반대편에 숨어 있는 나를 만나는 기분이 든다. 스쳐 지나갔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되고 그때의 내 느낌이나 생각을 곱씹어보게 되고 왜 그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기도 하면서 나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나를 꿰뚫고 나면,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