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금별 Nov 12. 2024

그림, 가을 속으로

자연 속에서의 첫 드로잉 수업이기에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내리문화공원으로 향했다. 드로잉을 배운다고 하면서 햇볕이 들지 않는 도서관 강의실에서만 그림을 그리던 우리는 가을이 묻어있는 바깥을 선택했다. 삼삼오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우리는 이미 소풍을 나온 유치원생처럼 들떠 있었다.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 길에 새신부처럼 분홍으로 부드럽게 물든 핑크뮬리가 눈에 들어왔다. 집 근처에서 핑크뮬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입장료 3천원이 드는데 여기는 공짜였다. 안성천이 내려 보이는 곳에 짐을 풀어놓고 우리는 그림 대신 눈에 풍경을 담았다. 그림이야 손으로 그린다지만 눈만큼 정확한 캔버스는 없을 것이다. 내리쬐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따스한 차를 마시니 마음에 온기가 감돈다. 그림이야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 시간이 좋았다.  

   

예쁘게 물든 메타세콰이어 나무와 물에 어리는 윤슬이 좋아 눈을 떼지 못하고 풍경만 감상한다. 올해는 여름이 더워서 단풍이 예쁘게 안든다더니 그것도 아닌지 제법 예쁘게 단풍이 든 나무들이 보인다. 놀이터에는 소풍 나온 아이들이 병아리처럼 노닐고, 무르익은 가을의 이 한가로움이 좋다.      


마침 근처에 구절초 동산이 생겼다고 해서 짐을 놔둔 채 가을 햇살 속으로 걷기로 한다. 정읍에나 가야 구절초를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지척에 구절초들이 만개해 있었다. 그 여린 몸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가을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 사이를 걸으며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이게 가을이지! 소풍 나온 것 같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구절초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우리는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구절초의 향기에 젖어든다. 몸과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구절초 동산을 돌고 각자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이것도 그려야지, 저것도 그려야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두었지만 눈을 따라올 만한 것은 없다. 햇살이 따스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눈에 보이는 대로 가을을 그린다. 소실점을 찾아보고, 가까이 있는 것은 뚜렷하게, 조금 더 멀리 있는 것은 흐릿하게 스케치를 한다. 수채크레파스를 이용해서 쓱쓱 망설임없이 나무를 그리고, 길을 그리고, 풀을 그린다. 물을 그리고 싶지만 생략한다. 오늘은 물감을 깜빡했으니 갖고 있는 재료만으로 완성해간다. 그렇게 가을이 완성이 되고 있었다.  

   

가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겨울로 들어설 줄 알았는데 가을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지구가 더워질수록 가을은 짧아지고 짧아진 만큼 아쉬움을 남긴다. 가을이 없는 사계절은 생각할 수도 없는데 그 아쉬움에 옷자락을 잡혔는지 가을이 머무르고 있다. 오늘 가을은 내 그림 속에 온전히 머물렀고, 나는 그 가을을 마음에 담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테지만, 내 안의 가을은 아직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소소한 일상 그리고 만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