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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하마 Jan 31. 2024

육아가 적성에 안 맞는 사람-4

꿈꾸던 일상 3. 여유 있게 출근하여 칼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드러눕기

결혼 전에는 늘 정해진 출근시간보다 1시간정도 일찍 출근하곤 했다.

오전 8시가 되기 전에 학교에 도착하면 여유 있게 그날의 시간표를 확인한다. 수업할 교재를 살피며 미리 수업 때 활용할 자료들을 시간별로 모아 셋팅한다. 그 주까지 제출해야 하는 업무도 1교시 수업 전 될 수 있으면 미리 제출한다. 계획적이고 소심하다보니 뭐든 미리 준비해야 안심이 된다. 또한 일머리도 순발력도 없는 편이라 미리 천천히 시작하지 않으면 실수할까 두려웠다. 


여유롭게 한 숨 돌리며 제대로 준비한 하루는 계획대로 잘 흘러간다. 특히 학교는 '학생들의 돌발 행동'이외에는 큰 변수가 없다. 정해진 시간표, 교육내용과 계획된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하는 행동만 면밀히 관찰하고 보살피면 됐다. 신규교사 시절보다는 그런 것들도 조금씩 대처하는 요령이 생기며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학기 초 한 달만 지나면 칼퇴근이 가능했다. 모든 업무와 수업을 학교에서 마무리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당연히 집에 업무를 들고 오는 일은 전무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내 시간이 많았기에 대학원도 다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대학원 과제를 하거나, 논문을 작성했다. 헬스장에 다니기도 했고, 남친이었던 남편과 꽁냥꽁냥 데이트도 했다. 신규발령 때를 제외하면 초중고를 졸업한 그 동네에 계속 살았기 때문에 동네 친구들도 종종 만났다. 자유로웠지만 뭔가 번잡했다. 나만의 고요한 일상은 부족했다. 그땐 대학원 졸업 후 결혼해 안정을 찾으면, 저녁시간을 좀 더 조용하고 편안하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하면 외투도 벗기 전에 쇼파에 드러눕고 싶었다.

안락하고 푹신한 쇼파에서 "퇴근했다!"라는 희열을 몇 분이라도 느낀 후, 천~ 천히 일어나 나만의 저녁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여유 있게 운동도 하고, 싱싱한 재료로 만든 알리올리오 파스타를 예쁘게 플레이팅해 먹는 것. 잔잔한 재즈음악와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것. 가끔 남편과 함께 빔 프로젝터에 비춘 영화를 함께 보며 맥주를 즐기는 것,


하지만 서른 살의 초보 엄마가 되자마자 꿈꾸던 일상은 물건너갔다.


헐레벌떡 딸아이를 친정엄마한테 보낸 후 학교에 출근하면 이미 학생들은 바글바글 등교해 있다.

교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정신을 차릴 새 없이 이것저것 하소연하고 걱정하는 학생들의 한탄을 들어 준다. 그런 학생들을 다독여 조례하고 오라고 올려보낸다. 학생들이 조례를 받는 10분간 나의 시간표부터 서둘러 확인한다. 오늘은 1교시부터 수업이 있다. 1교시 수업 할 교재를 꺼내는 찰나, 학부모님꼐 전화가 온다. "선생님 이건 어떻게 써서 제출하나요?" "아 네! ~해서 내시면 돼요~~^^" 그리고 다시 1교시 수업 내용을 확인하려는 찰나 학생의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온다. "~가 이 수업이 어렵다는데 그시간에 그냥 도움반 내려가면 안 될까요~?" "그렇군요~ 네~ 일단 오늘은 보내주세요. 학부모님과 상의해 시간표 수정해볼게요. 감사합니다!"...하다가 1교시 수업종이 쳐 버린다.


아.. 제대로 수업준비 못 했는데, 이 내용 수업하려면 이 사진이랑 동영상 보여주면서 해야 하는데, 이 실물 재료 보여줘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수업 도중 사진,영상자료를 찾고 재료를 찾아 아이들에게 보여주느라 수업이 맘대로 되질 않는다. 만일 내사 지도하는 교생 선생님이 이렇게 준비가 미흡한 수업을 하면 따끔하게 질책했을텐데, 속으로 생각한다. 


수업도 맘대로 되지 않고,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급급해 수업하다 보니 업무할 시간도 없다. 업무를 다 하지 못했는데 퇴근 시간이다. 그냥 이거 다 마무리하고 퇴근하고 싶은데,, 노트북을 집에 가져가기는 정말로 싫은데... 하지만 정시 퇴근은 안 할 수가 없다. 우리 딸이 유치원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아이중에 한 명이기 때문이다. 칼퇴근 시간에 딱 나와야 우리 딸이 하원 꼴찌를 면한다. 지난번에 학부모 상담 때문에 20분정도 늦었더니 혼자 엄마가 오나 안오나 살피며 하츄핑을 색칠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일거리를 싸들고 퇴근한다.


학교에서 유치원으로 달려가 딸아이와 함께 퇴근한다. 퇴근 후 바로 눕지 못하고 딸아이 유치원 가방에서 알림장을 살핀다. 동시에 앞치마도 입고 저녁 재료를 몽땅 꺼낸다. 내 입맛이 아닌 딸아이와 남편의 입맛에 맞을만 한 반찬과 국을 열심히 고민해 혼비백산 요리한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굽고 쪄서 먹는거, 한그릇 음식같은 것이 좋은데. 그렇게 차리면 우리 집 아저씨와 꼬맹이가 잘 먹을 리 없다. 차린 것도 없는데 50분이 훌쩍 지나있다. 퇴근 후 바로 서서 요리하는것만큼 진빠지는게 있을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그와중에 따님은 아침에 했던 반찬투정을 또 한다. 부글부글 끓지만 참다가 주는대로 먹으라며 또 혼내버린다. 바로 후회한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자괴감이 든다.


저녁 먹고 치울 새도 없이 따님의 명령에 따라 병원놀이의 환자 역할을 수행한다. 진짜 환자처럼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자꾸만 하품이 나고 눈이 감긴다, 졸음 참고 공부하던 고3시절처럼 잠을 이겨내려 애쓴다. 그러다 절대 안 씻겠다는 따님을 어르고 달래며 씻기고, 그림책을 읽어주고, 토닥토닥 재운다. 오늘은 따님이랑 함께 잠들만 절대 안 된다. 학교에서 다 못한 일을 해야 한다....잠깐 누웠다 눈 떴더니 새벽 1시다. 따님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다. 으악, 튕기듯 일어나 싸들고 온 업무를 마무리하고 3시에 다시 눕는다. 아 맞다, 저녁먹은 거 안 치웠지, 그냥 자면 내일 아침밥 못 차린다. 다시 일어나 거실을 치우고, 식기세척기에 그릇들을 넣고, 식탁을 닦은 후 새벽 3시 반에 잠든다. 그리고 몇 시간 못 자고 또 일어나 이번에는 아침식사를 준비하러 앞치마를 입는다.


워라벨과 여유는 내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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