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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민 Sep 29. 2024

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2. 나의 달리기

 새로운 메모장을 켜놓고 8월에 달린 거리를 정산해 보았다. 총거리는 약 110킬로미터 정도. 옆쪽에 간간이 써두었던 일지를 다시 읽어봤는데 시기별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첫 시작으로는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그냥 달리자‘라는 마음가짐,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가 오는 날은 러닝머신 위를 뛰었다. 그리고 할당량은 킬로미터로 측정하는 대신, 시간을 정해두고 달렸다. 가장 큰 이유는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치고 싶어서였다. 현재 나의 달리기의 단점을 꼽아보라 한다면 기록에 집착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페이스가 1킬로미터 평균 5분 20초를 넘기기라도 하면 무리해서 속도를 올린다. 장거리 러너로서는 현명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오래 활동하고 싶다면 반드시 고쳐야 할 부분이기에 제일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럭저럭 기록에도 덜 집착하게 되었고, 이제 열심히 뛰는 일만 남은 상황에서 새로운 허들이 생겨났다. 폭염 경보를 기다렸다는 듯, 태양은 매일 같이 맹렬한 기세를 드러냈다. 끓어오르는 열기에 호흡이 일그러지기 일쑤였고, 발은 지면에서 올라오는 뜨거움으로 쉬이 피로해졌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땀은 부지런히 눈으로 들어왔다. 그걸 손으로 닦아내면 소금기에 더 따가워질 뿐이었다. 매 순간 멈추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만 했다.

 더위를 뚫고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한 8월, 거친 숨을 고르는데 문득 1년 전이 떠올랐다. 육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고통이었던 그때의 기억들. 어둑어둑한 하루의 터널 속에서 달리기는 유일한 출구가 되어주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나간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심호흡을 하고, 강변을 향하여 슬슬 달린다. 점점 올라가는 속도, 덩달아 심박수도 올라가자 이내 숨은 거칠어진다. 반대로 거칠게 요동치던 마음의 파도가 비로소 잔잔해지는 걸 느낀다. 그렇게 나는 견뎌냈다.


 2023년 9월, 나는 마라톤 경기에 신청했다. 가을 시즌이 되면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이름의 마라톤 경주가 열리는데, 내가 신청한 경기는 서울에서 개최되는 마라톤 대회였다. 이 경기에 신청한 이유는 상당히 심플했다. 익숙한 장소라 마음이 편한 것, 그리고 한강을 달리는 코스는 꼭 한 번 제대로 뛰어보고 싶은 것. 대회가 개최되는 공원에는 정말 많은 인파가 모였다. 마라톤 코스는 총 3개(5, 10, 20킬로미터)로 이루어져 있고, 내가 선택한 코스는 10킬로미터 코스였다. 코스 구성은 거리의 차이만 조금씩 있을 뿐, 비슷한 동선으로 짜여있었다. 공원을 출발하여 한강변을 달리고 공원으로 돌아오면 되는 코스다. 제일 먼저 출발하는 팀은 5킬로미터 팀이었다. 중앙에 인원들이 모여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몸을 풀고, 카운트 다운에 맞춰 출발했다. 10분이 지나고 10킬로미터 선수들의 집합 방송이 나왔다. 하나 둘 출발선에 서서 가볍게 몸을 풀며 대화를 나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들과 함께 참가한 이들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들은 어쩐지 설레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의 중간중간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10킬로미터, 짧다면 짧은 거리지만 그들만의 다짐이 있는 것이다.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에서 묘한 긴장감이 보인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각오를 가지고 임하고 있다. 함께 외치는 카운트 다운이 10부터 0까지 착실하게 내려오고, 뒤이어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출발을 알리는 소리에 서서히 발을 교차해 나갔다.


 오늘은 그날의 마라톤 경주로부터 딱 1년이 지난날이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에 그날 경기를 회상했다. 그날의 기록은 53분. 그럭저럭 괜찮은 기록이지만, 출발하기 전 좋은 컨디션에 비하면 조금은 아쉬운 기록이다. ‘어쩌면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겠는 걸’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5킬로미터를 턴하고 6킬로미터쯤 되자 다리는 급격하게 둔해지기 시작했고 9킬로미터쯤부터 헛구역질이 나왔다. 몸 곳곳에서 지르는 엄살섞인 비명을 무시해가며 결승선을 넘었다.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깨우친 경기였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만.

 

 지금 나는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있다. 이번 코스는 작년 보다 5킬로미터를 더 추가한 15킬로미터의 코스. 비록 정식 대회가 아닌 혼자서 준비한 경기지만 나름대로 미리 코스도 뛰어보고 지도로 동선도 틈틈이 체크했다. 어느 정도 몸은 풀었고, 신발끈도 단단히 동여맸다. 어떤 기록이 나올까 잠깐 생각해 봤지만 가늠할 수 없다. 작년보다 더 형편없을 수도 있고,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몸을 바르기 세우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뛰는 행위 그 자체를 생각하자, 그리고 최선을 다하자라고 마음먹지만 이것마저 장담할 수 없다. 정식 코스가 아니기에 따로 급수대가 준비돼있지 않다. 포기할만한 요소가 도처에 널려있다. 마음을 굳게 먹어본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잘 달래어 결승선을 지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고통은 점차 흐려질 것이다. 이윽고 ‘다음에 조금 더 확실하게 준비해야겠다’ 생각할 것이다.


 결국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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