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그러면, 여기 차 세우고 둘 다 내려놓고 갈 거야!” 자동차 뒷좌석에서 발차기로 격투기를 하던 두 아이가 이 말 한마디로 잠잠해졌다. 내가 무섭긴 한가 보다. 주말 저녁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다니 하늘을 날다 갑자기 떨어지는 새 마냥 기분이 곤두박질친다. 사건의 발단은 지긋지긋한 코스트코 영수증이다.
4년 전쯤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 외곽에 있는 코스트코 매장에 간다. 근처 음식점에 큰 유아 놀이방이 있어서 부모들은 아이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식사할 수 있다. 일요일 저녁에 여기서 저녁을 먹고 코스트코에서 장보고 집에 돌아오는 루틴이 생겼다. 호야는 자기만의 규칙을 잘 만드는데 어느 날 보니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호야 규칙의 특징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조례가 아니고 꼭 준수해야 하는 법률적인 성격을 띠는데 가족 구성원과 논의하고 공표하는 절차 없이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난데없이 효력을 발휘한다. 사정이 있어서 호야법을 못 지킬 때도 주최자의 양보는 거의 없으며 보통 눈물바다를 동반한다. 매장에서 계산하고 나오는 길에 점원은 영수증과 카트 안에 물건이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물건을 대량으로 판매하니 혹시나 있을 수 있는 계산오류나 절도 등을 방지하는 목적인 듯했다. 호야의 새로운 규칙은 영수증을 꼭 자기가 들고 점원에게 확인받는 의식이다.
호야는 특히 남자 점원에게 영수증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호야가 영수증에 집착하자 민이도 가세했다. 민이는 시샘이 많아 그런지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 형 따라 하기를 좋아한다. 형이 하는 건 다 좋아 보이는 모양이다. 민이가 형이 준수하는 사소한 규칙들을 자기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자 골치가 아파졌다. 민이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세 치 혀를 놀려 나름의 논리를 구사하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땡깡 할아버지를 호출한다. 호야는 민이가 큰소리를 내며 생떼를 부리면 기가 질려 그냥 양보해 버리기가 일쑤다. 하지만 호야도 코스트코 영수증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지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을 잡은 듯이 버티곤 한다. 궁여지책으로 두 아이가 차례로 영수증 의식을 하기로 했다. 호야가 먼저 직원에게 영수증 확인을 받고 나면 남편은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아이가 좋아해서 그러니 한 번만 더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민이가 영수증을 들고 확인받았다. 어떤 직원은 웃으면서 영수증에 하트 표시를 그려주기도 했다.
이대로 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어느 날부터 민이가 자기가 먼저 영수증 확인을 받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호야가 이를 수긍할 리 없었다. 주말 저녁, 사람들이 쇼핑카트 가득 물건을 싣고 바쁘게 지나가는 길목에서 고작 영수증 가지고 고집부리는 두 아이를 보니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내 두피의 모든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했다. 지친 남편이 그럼 오늘은 민이가 먼저 하자며 일방적으로 민이 먼저 영수증 의식을 치르게 했다. 이에 분개한 호야는 “싫어!”라고 매장이 떠나가게 크게 외치고는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내내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했다.
호야는 남이 보기엔 별거 아닌 일로 크게 감정이 상하면 장시간 울곤 하였다. 이것도 사고의 유연성 때문인가. 이럴 때는 장마철에 옷이 몸에 치덕치덕하게 휘감기는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든다. 나는 감정도 보송보송하고 칼로 자른 듯 단정한 모양이면 좋겠다. 이 아이는 정말 나와 안 맞는군, 생각한 적도 있었다. 코스트코 대 통곡 사건은 호야가 1학년 때 일이니 벌써 3년 전이다. 당시 다니던 발달센터에서 상담하는 시간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님이 나를 크게 나무랐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하면 안 되고 아이가 수긍할 수 있게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나름의 조정을 위해 코스트코 가는 길에 미리 아이들의 다짐을 받아보기로 했다. 아이들과 이야기해서 오늘은 누가 영수증 의식을 먼저 할 건지, 지난번에는 누가 했는지 대화하곤 했다. 미리 조정한다고 해도 호야는 수긍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이가 크면서 갯벌에서 썰물 빠지듯 호야의 눈물바다도 점점 잦아들었다. 울음 시간이 줄어든 대신 썰물 빠진 갯벌에는 발 쿵쿵 구르기, 주먹으로 벽치기, 문 꽝 닫고 방에 들어가기, 멍멍이 등장하는 욕설이 난무했다.
문제는 호야가 컵스카우트에서 첫 부산 하이킹을 다녀온 날 시작되었다. 올해 초 친구 엄마의 권유로 컵스카우트에 가입했는데 아직 호야가 느린학습자라고 담당 선생님들께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일찍 대구에서 부산까지 무궁화호를 타고 가서 해운대 바닷가에서 줍깅을 하고 버스로 역까지 이동해서 ITX를 타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호야가 앞에서 지시하는 선생님 말씀을 다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불안하면 화장실에 자주 가는데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저녁 7시가 넘어 컵스카우트 대원들과 함께 동대구역에 도착한 호야를 맞이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얼굴이 햇볕에 까맣게 그을렸고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당했다는 표정의 호야와는 달리 나는 무사히 돌아온 아이를 보니 너무 반갑고 안도감이 몰려와 눈물이 날 뻔했다. 다들 피곤한 상황이니 집에 가거나 집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완벽한 하루를 원하는 민이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코스트코에 갔다.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닌가 싶었지만, 식당이 문 닫기 전에 전화로 미리 메뉴를 주문해 놓고 부지런히 가서 저녁을 먹은 후 코스트코에 갔다. 매장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데 두 아이가 영수증을 가지고 또 실랑이했다. 내가 계산한 물건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사이 호야와 민이는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계산한 물건을 쇼핑카트에 넣어놓고 두 아이를 보니 둘 다 심술이 나 입이 오리주둥이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가위바위보로도 오늘의 영수증 의식 주최자는 누구인지 결론이 안 난 모양이었다.
사정을 들으니 두 아이가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첫판에 민이가 이겼다. 여기에 승복할 리 없는 호야가 한 번 더 하자고 우기는 상황이었다.
“가위바위보 졌으니, 오늘은 어쩔 수 없어. 규칙을 지켜야지!” 남편이 호야에게 말했다.
“싫어!” 호야가 발을 쿵쿵 구르며 매장이 떠나가게 외쳤다.
“너 오늘 누리로도 타고 하고 싶은 거 다 했잖아. 형에게 양보해!” 남편이 그래도 말이 통할 때가 있는 민이와 협상을 시도했다.
이 상황에서 민이가 물러날 리 없었다. 나는 해결을 하려면 한쪽으로 밀 것이지 시소 타는 듯 이랬다저랬다 하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할 수 없이 내가 오늘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너희 둘 다 양보를 안 하네. 엄마가 말하는 세 가지 중 하나 골라!”
첫째, 둘이 해결을 볼 때까지 집에 못 간다. 둘째, 가위바위보를 한 판 더해서 이기는 사람이 영수증을 차지한다. 셋째, 영수증은 아빠가 처리한다.
아이들이 두 번째 방법을 골랐다.
“가위바위보 딱 한 번만 하는 거야, 졌다고 다시 하자고 하면 안 되!” 내가 다짐을 받았다.
“가위바위보!” 두 아이는 올림픽 결승에 오른 선수처럼 비장했다. 결과는 호야 승! 호야는 신이 나서 영수증 의식을 치르러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컵스카우트 하이킹에 무사히 다녀온 호야가 기특해 아이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쇼핑 카트에 앉아있던 민이 얼굴에 새까만 먹구름이 끼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꺼이꺼이 구슬프게 울었다. 이런 울음은 땡깡 할아버지보다 위력이 세다.
억울해하며 우는 민이를 보니 혼란스러워져서 주차장에서 차에 타기 전 아이를 안아 달랬다. 울음을 그친 민이는 차 타고 집에 가는 동안 형이 싫어하는 노래를 굳이 틀어달라고 하더니 큰소리로 반야심경을 읊기 시작했다. 남편은 핸드폰으로 반야심경을 틀어놓고 민이의 암송에 합세했다. 지난 겨울, 불교 신자인 시어머님께서 반야심경을 민이에게 알려주셨는데 아이는 음이 신기한지 종종 암송하곤 했다. 차 안에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와 반야심경 암송 소리에 호야의 그만하라는 외침까지, 듣기 싫은 소리가 한데 뒤엉켜 내 귀를 강타했다. 달리는 차가 아니라면 그만 차 문을 열고 내릴 뻔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민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보통 코스트코 영수증 확인에 목매달지 않아, 형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좀 다를 수 있어. 사람은 원래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 다른 거야. 네가 영수증 확인 규칙에 꼭 집착할 필요는 없어, 라는 요지의 말을 민이에게 했다. 아이는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민이 표정이 한결 편안해 졌다. 민이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다음에 코스트코에 가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온화해진 아이 눈빛을 보며 내 마음속에서 요동치던 파도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거북이 같은 호야와 토끼 같은 민이를 한배에 태우고 가려니 심심할 새 없이 늘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실마리가 보일 때도 있어 끝이 안 보이는 이 육아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