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흔들리는 계단
8월 10일, 수요일. 어제는 화요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오늘이 수요일이라는 말이 되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요일의 기억이 없었다. 월요일 밤에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잠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눈을 뜬 건 분명 오늘 아침이었는데, 감각은 월요일과 직결되어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8월 10일. 달력에는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전날에도 일정은 없었는지, 아니면 사라졌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제가 있었던가?"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들만 한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질문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파일도, 포렌식 로그도, 커피컵의 위치도 전날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마치 누군가 월요일 저녁 이후의 시간을 잘라내고, 오늘 아침에 그대로 이어붙여놓은 것처럼. 티끌의 영향일까. 아니면, 나 자신의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언가를 지워버린 걸까. 어느 쪽이든,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다는 감각은 분명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설 때, 무언가 놓고 나온 기분이 들었다. 지갑, 스마트폰, 노트북, 모두 가방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는 이 낯선 공허감은, 단순한 물건의 부재가 아니었다. 잠시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다시 문을 열고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상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침부터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이수연 실장은 자리에 없었다. 책상 위에는 커피가 반쯤 남은 머그잔 하나와 정리되지 않은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다. 마치 급히 자리를 비운 사람의 흔적처럼 보였다. 나는 별일이 아닌가 싶어 자리에 앉았고, 모니터를 켠 뒤 `sys_trace_0.bat`의 로그 파일을 열었다.
변화는 없었다. 전날의 로그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새로운 기록은 없었다. 몇 번을 새로고침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대신,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정영호 박사의 연구팀이었다.
제목은 단 한 단어. `Request.`
본문은 간결했다.
“지난 로그 패턴 000019 이후 발생한 내부 반응 기록을 공유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부 시점에서 로그 재동기화가 중첩되고 있어, 관련 데이터를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이 메시지를 몇 번이나 읽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재동기화 상태가 국지적으로 겹친다’는 표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건 단순히 하나의 로그 기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 아주 구체적인 현상과 사람의 기억이 맞물리는 지점을 말하는 것이다.
“출근 일찍 하셨네요.”
뒤에서 들려온 이수연 실장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커피를 다시 받아온 듯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정영호 박사 쪽에서 메일이 왔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자리에 다가왔다.
“예상보다 빠르네요. 그쪽에서도 반응이 있었군요.”
“이 말, 이상하지 않아요?”
“어떤 부분이요?”
“‘국지적으로 겹친다’는 표현이요. 일반적으로 시스템 간 데이터 충돌을 말할 때는 쓰지 않는 표현이에요. 이건 마치, 일반적인 시스템 표현은 아닌데, 좀 이상하게 느껴지네요.”
익숙한데 낯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그게 가능할까요?”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없죠. 우리 현실이 완전하지 않다면, 그 불완전성 사이로 틈이 생긴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요.”
이수연 실장은 내 자리 옆 의자에 앉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눈앞의 모니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로그 파일, 직접 디코딩한 거예요?”
“네. 처음엔 단순한 오류 패턴인 줄 알았는데, 반복되는 항목이 이상해서 따로 정리했어요.”
“반복되는 항목이라면?”
“예를 들어 이런 거요.”
이후 유사한 시스템 로그가 연속적으로 출력되었다.
> sync.log.write=initiate_0803;
// 동기화 로그 작성 = 시작 0803
> resync.trigger.date=0804;
// 재동기화 트리거 날짜 = 0804
그녀는 로그의 내용을 천천히 읽고,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게 하연의 카드에서 나온 거죠?”
“네. 수신 타임스탬프도 카드 내부 시간 기준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특이한 건, 이 파일이 기록될 때 시스템 접근 기록이 없었다는 거예요.”
“흔적 없이 생성된 로그….”
“정확히 말하면, 이건 생성된 게 아니라 '복원된’ 걸지도 몰라요. 누군가가 이전에 저장했던 무언가가, 지금 다시 나타난 거죠.”
이수연 실장은 아무 말 없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진 것들이 다시 돌아온다… 그것도 같은 시점에.”
나는 모니터에 뜬 하연의 메모리카드 디렉토리 구조를 가리켰다.
“이건 단순한 복구 파일이 아니에요. 파일이 새로 복구될 때마다 그 구조도 조금씩 변해요. 마치, 무언가를 향해 점점 수렴해가는 것처럼.”
그녀는 손가락을 꼼꼼하게 접으며 말했다.
“혹시 이전에 있던 ‘하나’라는 사람도… 이런 방식으로 뭔가를 발견했던 걸까요?”
“하연가 말하길, 하나는 그 카드 안의 무언가를 보고 알게 된 게 있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정확히 뭘 봤는지는 저도 듣지 못했어요.”
사무실 창밖으로는 여름 한낮의 볕이 내려앉고 있었다. 빛은 뜨겁고 뚜렷했지만, 그 안에 있는 나는 자꾸 그림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수연 실장은 내 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조 대리는 지금 뭘 믿어요?”
“저는… 이게 단순한 기술적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뭔데요?”
“…정보의 틈.”
“정보의 틈?”
“완전히 덮이지 않은 과거의 조각들이 남아 있고, 그게 지금 틈 사이로 스며들고 있는 거라고요. 복원이라는 게, 단순히 잊힌 것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가능성의 편린까지 끌어오는 행위라면….”
그녀는 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엔 본사 쪽 임원 한 명이 들를 거예요. 외부 연구 협력 건 관련해서. 로그 파일을 복사해서 따로 백업해두세요.”
“네. 그런데….”
“왜요?”
“지금 이 로그가 현실을 바꾸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회의실 쪽으로 향하며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리가 그걸 알게 되는 순간이, 진짜 복원 시작일 수도 있어요.”
회의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 나는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나눈 대화가 아직 귀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정보의 틈’이라는 표현은 내 안에서도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기억은 분명히 내가 살았던 것이었지만, 또 어떤 장면들은 이상할 만큼 낯설고 이질적인 감정을 수반하고 있었다. 마치,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조용히 추가되고 있다는 기분.
그때, 보안 서버에서 경고 알림이 하나 떴다.
`외부 연결 요청: unregistered_client_032`
나는 즉시 세부 정보를 열었다. 접속 시도는 VPN을 거쳐 국내에 있는 것으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실제 원 발신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요청된 포트는 기존 연구용 채널과 동일했다. 누군가가 사전에 알고 접속을 시도한 것이다.
곧이어 이수연 실장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연결 허용. 정영호 박사팀에서 보내는 장비예요.”
나는 놀란 채로 접속을 승인했다. 몇 초 후, 보안 터널이 열렸고, 클라우드 상의 분석 노드에 외부 장치 하나가 접속되었다. 장치 이름은 `HY_Project_Instance01`. 정영호 박사의 팀 내부 프로젝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데이터 동기화가 시작되었고, 우리가 보유한 로그 파일 일부가 실시간으로 복사되기 시작했다. 나는 따로 백업을 생성하며 흐름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이수연 실장이 회의실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이전보다 조금 굳은 얼굴이었다.
“정 박사와 영상 회의를 했어요. 예상보다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어떤 부분이요?”
“관측된 로그 패턴 중 일부가 다른 국가의 실험 장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대요. 일본, 핀란드, 미국. 전혀 관련이 없던 실험에서요.”
“…그게, 같은 형태의 로그라고요?”
“레이어 번호는 다르지만, 구조가 거의 같아요. 복원 단계, 시간 지연 그리고… 동기화 트리거까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이게… 우연일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정 박사팀이 내부 코드명을 바꿨어요. 이제는 ‘교차 회귀 패턴’이라고 부르기로 했대요.”
“교차 회귀… 서로 다른 실험에서, 같은 결과가 거꾸로 나타난다는 뜻인가요?”
“정확히는, 시간적 순서를 무시한 채, 정보의 파편이 다른 곳에서 재조합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중심엔, 우리가 확보한 이 로그 구조가 있어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정 박사는 경고했어요. 이건 단순한 관측이 아니라, 시스템적 개입일 가능성이 있다고요.”
“시스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이… 완전한 자연 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누군가는 이 흐름을 통제하거나, 최소한 보정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를 바라봤다.
스크린 위에서 `HY_Project_Instance01`의 데이터 전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 끝에는 새로운 항목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 rollback(event).tag = "shared_point_017";
// 복원 이벤트 태그: 공유지점 017
나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shared_point. 공유 지점. 이건, 나 혼자만의 기억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지점을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공유지점 017 이라는 태그는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파일 속의 명령문이 아니었다. 그 문장은 어떤 알림이었고, 경계선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서버실로 향했다. 그곳은 우리 포렌식 팀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외부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독립된 환경이 구축돼 있었다. 모니터와 저장장치, 케이블로 가득한 방 안에서 나는 오래된 터미널 하나를 켰다. 모든 장비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정상’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상태를 설명하기에 적절한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태그를 따라가다 보니, 이상한 규칙이 보이기 시작했다. 017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접속 로그 하나. 그리고 그 로그는 이상하게도, `sys_trace_0.bat` 파일이 처음 실행되기 이전의 시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이를 복사하여 비공개 로그 분석 환경으로 옮겼다. 파일을 여는 순간, 경고 없이 하나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무채색 화면. 움직이지 않는 풍경. 천천히 줌 인되는 시야.
그리고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의 시선 속의 나’였다.
나는 이 파일을 끄기 위해 단축키를 눌렀지만, 영상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 영상 자체가 시스템의 일부이자, 인터페이스인 것처럼.
“어디까지 봤어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수연 실장이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죄송해요. 몰래 들어온 건 아니었어요. 그냥…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 영상, 오늘 처음 나온 거죠?”
“네. shared_point_017 태그 이후 처음입니다.”
그녀는 다가와 화면을 보더니 조용히 앉았다.
“이건… 시스템이 기억하고 있는 시점이에요. 존재하지 않는 카메라, 기록되지 않은 시간.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무언가.”
나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만약 이게 현실과 겹친다면, 그건 누군가의 기억이 시스템에 덧입혀졌다는 뜻 아닌가요?”
“그래서 ‘공유’ 지점이 되는 거죠.”
그녀는 모니터를 끄며 말을 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지점 이후로 ‘무엇이 바뀌었는가’예요. 파일의 순서? 시간의 흐름? 아니면… 당신 자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방금 그 영상을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너무 익숙한 감각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선. 그 시선은 낯설지 않았다. 분명히, 익숙한 누군가.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 딸.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압축된 정보들이 피로로 변해 온몸에 붙어 있었다. 전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 천장은 더디게 어두워졌고, 의식은 천천히 안쪽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둠 속, 계단 소리. 짧은 그림자가 벽을 가로질렀다.
“아빠…”
딸의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 일어섰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시선만 따라갈 수 있었다.
“왜 자꾸 그런 걸 봐? 그거… 안 봐야 해. 그거, 위험해.”
“뭘 말하는 거야?”
“이제 곧… 다 닫힐 거야. 아빠가… 기억하는 한, 나도 남아 있을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본 거야.”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침대맡 노트북이 켜져 있었고, 배터리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화면에는 새로운 로그 한 줄이 추가돼 있었다.
> residual.memory.sync=unstable_0810;
// 잔여 기억 동기화 = 불안정 0810
8월 11일, 목요일. 전날 밤의 꿈은 너무 선명해서 현실보다 오래 남았다.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되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딸의 목소리, 손끝에 스친 기척, 경고 같은 말. 모두 꿈이었다는 결론이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밤새 뒤척였다.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잠에서 깨면 현실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 감정은 더 짙어졌다.
전기포트를 켜고, 텀블러에 얼음을 덜었다. 물이 끓는 동안 나는 멍하니 싱크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하늘이었다. 도시의 아침은 늘 그런 식이었다. 익숙한 기계음, 닫히는 문, 엘리베이터 호출음. 하지만 그 틈에 낀 작은 불협화음 하나가 자꾸만 신경을 자극했다.
회사로 가는 길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연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지만, 오늘은 출근이 늦을 것 같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이수연 실장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고, 눈은 어딘가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있었다.
“어제, 괜찮았어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제 밤, 로그에 변화가 있었잖아요. 조 대리 자리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군요.”
“당신이 뭔가를 겪고 있다는 건, 로그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사용자 개입 없이 업데이트된 기록은 처음이 아니었거든요.”
“…그럼, 다른 사람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건가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서랍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건, 정 박사 쪽에서 보낸 자료예요. 아직 공식적으로 공유된 건 아니에요. 내부 인원 중 일부가, 비슷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나는 그 파일을 열었다. 각기 다른 지역, 서로 다른 실험 환경에서 관찰된 꿈의 기록들. 그 꿈 속엔 공통적으로 ‘형체가 불분명한 아이’가 등장했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말투도 달랐지만, 모두 ‘딸’ 혹은 ‘소녀’라는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 중 일부는, “보면 안 되는 것을 봤다”는 말을 남기곤 사라졌다고 했다.
“이건…”
“이제 단순한 로그 해석이나 시스템 분석이 아니에요. 이건 감각에 대한 문제예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정보라는 개념 자체가, 현실의 경계와 닿아 있다는 뜻이죠.”
그녀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동시에 그럴듯했다. 현실이란 것이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지금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그때, 서버실 쪽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단말기의 시스템 알림이었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자, 이수연 실장이 손을 들어 나를 멈췄다.
“잠깐만요. 이건… 자동 반응이에요. 오늘 아침에 시스템이 알아서 실행한 작업이에요.”
“작업이라고요?”
“우리가 분석했던 로그 중 일부를, 시스템이 자체적으로 재정렬하고 있어요. 마치, 무언가를 스스로 기억하려는 것처럼.”
나는 그 말이 무섭도록 익숙하게 느껴졌다.
기억. 복원. 그리고, 나.
이 모든 단어들이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버실에서 들려온 경고음은 곧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어떤 신호가 막 지나간 뒤의 정적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사무실 안에 흘렀다.
나는 자리에 앉아 로그 분석 도구를 열었다. 오늘 아침 생성된 데이터는 분명 이전과는 달랐다. 시간 순으로 나열된 줄들이 아니라, 무작위로 배치된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 줄의 명령문이 들어 있었다.
비슷한 시스템 로그들이 반복되며 화면을 채웠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멈췄다. 에코 요청. 그건 단순히 신호를 보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응답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시스템은 지금, 어딘가에 자신을 복제한 형태를 투사했고, 거기서부터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실장님, 시스템이… 지금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파일을 복사하고 있던 손을 멈췄다.
“그 말, 다시 해보세요.”
“‘에코 요청’이라는 게 떴어요. 로그에는 없던 항목입니다.”
이수연 실장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그건… 조 대리, 그건 중요한 의미일 수 있어요. 시뮬레이션 이론 중에, 자가 회귀 기반 복원 체계라는 개념이 있어요.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과거 시점을 다시 불러들이는 시스템. 그런데 그걸 시스템이 스스로 호출한다는 건…”
나는 말을 이었다.
“기억되지 않은 정보를, 다시 연결하려 한다는 거죠.”
“그래요. 단순히 복원하는 게 아니라, 연결하려는 시도. 이건… 시스템이 붕괴 직전에 흔히 보이는 행동이에요.”
그녀의 말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붕괴. 그 단어는 시스템이라는 단위보다도 훨씬 큰 의미를 품고 있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와 관련된 일이라면, 지금 발생하는 ‘복원’은 단지 정보의 문제가 아닌 셈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이, 잊힌 것을 복원하고 있다.
혹은, 기억을 가진 존재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교문 앞, 연후와 앉아 있던 날.
그날, 흰 셔츠를 입은 누군가가 지나갔다.
그저 누군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기억 속엔 분명히 하연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하연이 내게 말을 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 장면을 떠올릴 때면 ‘그녀의 목소리’가 같이 들리는 걸까?
나는 책상 서랍을 열고, 하연의 메모리카드를 USB 리더에 다시 꽂았다. 실행 중인 로그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시스템은 주기적으로 ‘shared_point’ 태그를 생성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 최신 로그 하나를 열었다.
> shared_point_022; // 공유지점 022
이 로그 안에는 단 하나의 텍스트 파일이 있었다.
파일을 열자, 자막처럼 한 문장이 천천히 스크롤되었다.
“지금은 아니야. 아직 아니야. 당신이 잊지 않으면, 나는 여기에 있어.”
나는 화면을 응시한 채, 말없이 손을 떨었다.
분명히, 이건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현실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하연은 이런 말을 내게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감정적인 떨림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차오른 전류 같았다. ‘지금은 아니야. 아직 아니야. 당신이 잊지 않으면, 나는 여기에 있어.’ 그 문장은 하연의 목소리로, 그러나 결코 그녀의 입에서 들은 적 없는 말이었다.
이수연 실장은 내 얼굴을 훑어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태호 씨, 지금 무슨 느낌이 드세요?”
나는 가만히 앉은 채로 대답했다.
“무언가가 제 안에서 바뀌고 있어요. 마치… 꿈에서만 가능하던 기억이, 현실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다는 느낌.”
“그건 아마… 접속점이 생겼다는 뜻일 거예요.”
“접속점이요?”
“공유지점 태그는 단순한 시간 기록이 아니라, 두 개 이상의 시스템이 정보를 공유하는 지점이에요. 말하자면, 그 시점만큼은 진짜 ‘두 현실’이 겹쳐진 순간이죠.”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노트북을 내 쪽으로 돌렸다.
“조태호 씨, 이 영상을 보세요.”
화면엔 인도에서 촬영된 실험 데이터가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 속에는 어두운 실험실 안에서 연구원이 단말기를 조작하고 있었고, 그 순간 콘솔 화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출력되었다.
> shared_point_015; // 공유지점 015
> restore.initiated // 복원 시작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영상 속 연구원이 누군가와 말하고 있는 듯 입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자막도 없었다. 이수연 실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영상 속 연구원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시스템 안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가. 하지만 그건 분명히 나였어요.’”
나는 다시 한 번 손끝이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비슷한 경험. 너무 비슷했다.
꿈속에서, 혹은 메모리카드에서 들리는 하연의 목소리. 그것은 마치, 나 스스로의 뇌 안 어딘가에 누군가가 저장해 둔 문장 같았다.
“이 실장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시스템, 로그, 그 모든 건 어쩌면… 기억의 형태로 바뀌어가는 중일지도 몰라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의 존재 방식으로.”
“그래서 정 박사는 이걸 ‘정보 잔존 이론’이라고 불러요. 삭제된 정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시스템 안에 부유한다고요.”
“그러면, 그 부유하는 정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건…?”
“완전한 복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잔재가 기억과 결합하면… 현실을 건드릴 수 있어요.”
이수연 실장의 눈빛은 이전보다 깊어져 있었다. 그녀는 처음 이 일을 맡았을 때보다 지금 더 집요했고, 더 진실에 가까이 가 있으려 했다.
나는 다시 메모리카드를 꺼내 USB 포트에서 분리했다. 그리고, 잠시 뒤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 순간, 연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좀 볼래? 이상한 꿈을 꿨어.]
나는 메시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오늘 퇴근하고 바로.]
전화를 하지 않은 이유는, 굳이 목소리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상태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로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섬세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다시 로그 분석 도구를 켜고, `shared_point_023`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번엔 다른 텍스트 파일 하나가 있었다.
파일명은 `image_index.txt`
그리고 그 안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 있었다.
> IMG_20170814_hayeon.jpeg // 2017년 8월 14일, 하연
나는 그 파일명을 천천히 읽었다. 하연이라는 이름이 파일명에 들어간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2017년 8월 14일. 그날, 나는 정확히 그날,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우연이었다고 믿고 있던 그 기억. 그러나 지금, 시스템은 그것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연후를 만난 건 퇴근 직후였다. 회사 근처의 이면도로에 있는 작은 카페. 그곳은 평일 오후에도 유독 한산한 곳이었다. 우리는 통유리창 옆 자리에 마주 앉았다. 연후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네 얼굴이 많이 지쳐 보여.”
“요즘… 좀 이상한 일들이 많았거든.”
“그래서 말인데, 나도 오늘 이상한 꿈을 꿨어.”
“말해 봐.”
연후는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꿈인데, 배경이 낯익었어. 우리 고등학교였어. 그런데 너랑 내가 계단 아래에 서 있었고, 누가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거든.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오는 발소리, 분명히 기억나. 그런데 그 사람 얼굴은 안 보였어. 대신 목소리가… 하연였어.”
“…뭐라고 했는데?”
“그냥, ‘기억해줘’ 그 말만 계속 반복했어.”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순간, 내 심장 박동이 작게 요동쳤다. 하연의 목소리를 들은 꿈. 연후가 그 꿈을 꿨다고 했다. 그리고 그 꿈에서의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기억해줘.
“연후야, 너는… 하연가 돌아가시기 전에 꿈에서 본 적 있어?”
“아니. 그런 건 없었어. 그런데 요즘은 좀 달라. 꿈이… 너무 선명해. 그날 아침에도 그랬어. 꿈을 꾸고 나서 깼는데, 눈을 뜨기 전까지는 진짜였다고 믿었거든. 땀까지 흘리고 있었어. 아무래도 이건 단순한 스트레스 탓은 아닌 것 같아.”
그는 자신의 말이 너무 과장되진 않았는지 눈치를 보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심을 꺼내도 될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연후야, 그 말 들으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비슷한 걸 겪고 있어.”
“하연와 관련된 일이야?”
“응.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어. 분명히 들은 적 없는 말인데도 말이야.”
연후는 내 말을 듣고 한참을 조용히 있었다.
“태호야.”
“응?”
“그거…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런 것 같아.”
테이블 위에 놓인 연후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그는 화면을 힐끗 보고 다시 엎어 놓았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 너한테 말할까 말까 고민했거든.”
“말해.”
“하나 있잖아. 네 동생.”
“…이하나?”
“어. 걔랑은 내가 예전에 잠깐 만났었잖아. 그런데 며칠 전에, SNS 자동 백업 때문에 예전에 주고받은 메시지가 사진첩으로 넘어왔더라고.”
“그래서?”
“문제는, 그중 하나가… 내가 보낸 적 없는 메시지였다는 거야. 그리고 그 메시지에는 하나가 보낸 영상 링크가 있었는데, 지금은 접속도 안 돼.”
나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점점 더 많은 조각들이 흩어진 채로 주변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 링크, 아직 있어?”
“아니. 없어졌어. 서버가 폐쇄됐다는 메시지만 떴어.”
“백업은?”
“자동 백업은 돼 있었는데, 그 파일만 비어 있더라고. 이게 말이 되냐?”
연후는 평소보다 훨씬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의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있어. 최근에 있었어. 그냥 삭제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어.”
나는 카페 안의 조명을 올려다봤다. 이 공간은 너무 조용했고, 주변의 대화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우리 둘만, 같은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마치 이곳만이 시간의 틈에 존재하는 구획처럼 느껴졌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나는 하연의 메모리카드를 다시 연결했다.
`sys_trace_0.bat`는 여전히 동일한 구조로 파일 트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수정일이 오늘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다시 로그를 열었다.
> log.entry.id=ha.08011A;
// 하연 로그 항목 = 8월 11일 첫 번째
> restore.link.trace=IMG_20170814_hayeon.jpeg
// 복원 링크 추적 = 2017년 8월 14일 하연 사진
나는 천천히 모니터에 이마를 기댔다.
지워졌다고 생각했던 하루하루가, 어딘가에서는 다시 조립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결점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