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흔들리는 계단
8월 19일, 금요일. 하연과의 약속 장소는 시내 중심가의 작은 북카페였다. 퇴근 후 바로 이동했지만, 그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창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일찍 도착하셨네요.”
“혼자 있으면 마음이 조금 편해져서요.”
자리 맞은편에 앉으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손님은 거의 없었다. 낮은 조명, 잔잔한 음악, 나무로 된 테이블. 대화하기에 부족함 없는 공간이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부터 할까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USB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의 목소리… 다시 들었어요.”
“정확히는, 들린 거죠. 소리로도, 텍스트로도 아닌데… 그냥, 머릿속에서 말하듯이.”
저도… 처음엔 의심했어요. 하지만 그 감각은 반복될수록 더 선명해졌어요.
나는 노트북을 열고, 복원된 로그의 일부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키워드와 타임스탬프, 해시값과 파일 경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녀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듯했다.
“이건… 같은 계열의 데이터네요. 저도 비슷한 걸 봤어요. 경로가 없는 영상, 형식이 없는 사운드.”
“이게… 연결된 걸까요? 당신과 저, 그리고 그 아이까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어쩌면요, 우리가 서로를 알아봤기 때문에… 이 데이터가 연결된 건지도 몰라요.”
그 말은 단순한 감상 같았지만, 어쩐지 깊은 통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더 이상 무작위의 관찰자가 아니었다. 이 흐름 속에서 각자의 조각을 가진 참가자였다.
하연은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 아이와 대화하신 적 있으세요? 텍스트로나, 음성으로나.”
“아니요. 항상 짧은 장면, 그리고 한두 마디뿐이었어요. '아빠', 혹은 그냥 웃는 얼굴.”
“저는요… 며칠 전에 이런 문장을 봤어요. 화면도 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주 잠깐.”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거기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Don’t forget the blue door.]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blue door. 파란 문.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 표현은 오래전 꿈속에서 들은 적이 있었고, 포렌식 작업 중에 한 번 파일명으로 마주친 적도 있었다.
“기억나세요?”
“파란 문… 네.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낯설지 않아요. 꿈속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렇죠. 꿈인지 데이터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요. 요즘엔… 꿈에서 깼을 때가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니까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점점 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맥락으로 엮이고 있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무의식과 시스템, 기억과 데이터, 현실과 꿈.
그때, 카페 한구석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직원이 전화를 받는 모습이 보였고, 우리는 다시 침묵했다. 하연은 스마트폰을 덮고 말했다.
“그 문을 찾아야 해요. 어디에 있든.”
나는 대답 대신 USB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에는 그녀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문은 실재하든 아니든, 반드시 다시 마주해야 할 것이었다.
카페를 나와 어둑한 거리를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얼룩져 있었다. 하연은 조용했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 블록을 돌아 작은 공원 앞에 섰다. 사람은 없었고, 벤치에는 밤이슬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 여기까지죠. 더 알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네. 저도 그 파란 문,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그녀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아 한참을 서 있었다. 어두운 나무들 사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꾸 무언가가 보이는 듯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나면 항상 조금 후회가 남는다. 오늘은 더 그렇다. '왜 더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그 말을 그냥 넘겼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잠들기 전, USB를 다시 꺼내어 노트북에 꽂았다. 이번에는 단 하나의 파일만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파일명. `DOOR_BLUE_0001.BIN`
나는 숨을 삼키고 파일을 열었다. 화면은 검었다. 그리고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You’ve been here before.]
그 문장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무런 키도 작동하지 않았다. 전원 버튼을 꾹 눌러야만 노트북이 꺼졌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푸른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감정. 하지만 나는 문을 열 수 없었다. 손잡이가 사라진 채였다.
꿈에서 깬 후,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식은땀이 이불을 적셨고, 머릿속은 여전히 파란 문 앞에 머물러 있었다. 그 문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이 시스템, 이 오류, 이 꿈… 모두 거기서 시작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노트북을 켜자 이전 파일은 사라져 있었다. DOOR_BLUE_0001.BIN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최근 기록에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문 앞에 다녀왔다.
그날 오전, 수연 실장은 출근하자마자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표정이 단단했고, 그녀의 손에는 검은 USB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요. 어젯밤 자동 백업 시스템이 생성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파일 자체가 우리 시스템 외부에서 유입됐다는 거예요.”
“외부요? 인터넷이나 클라우드 경로로요?”
“아뇨. 더 이상해요. 경로가 없어요. 이건 마치… 어딘가로부터 '복사된' 게 아니라, '출현한' 것처럼 보여요.”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출현. 마치 존재하지 않던 것이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USB를 연결하자, 화면엔 낯익은 구조의 로그가 떴다. 단 하나의 폴더. 이름은 ‘RE-ENTRY’. 폴더 안엔 짧은 영상 하나가 들어 있었다. 재생을 누르자, 화면에 파란 문이 나타났다.
문 앞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흐릿한 실루엣. 그런데 그 실루엣의 높이와 윤곽, 걸음걸이까지도… 낯설지 않았다. 마치, 나 자신을 보는 듯했다.
나는 화면을 응시한 채 물었다.
“혹시 이 영상, 타임스탬프가…?”
수연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2025년 3월 14일. 아직 오지 않은 날짜예요.”
8월 20일, 토요일.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눈은 평소보다 더 일찍 떠졌다. 머릿속에 남아 있던 파란 문의 이미지가 그대로 망막 위에 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일어났다.
창밖은 흐렸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곧 내릴 것 같은 기운이었다. 휴대폰을 켜자 하연에게서 새벽에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몇 분 뒤, 위치 좌표 하나가 전송되었다. 시 외곽의 오래된 병원이었다. 폐쇄된 지 수년은 지난 듯한 낡은 건물. 이유를 묻지 않고 준비를 마쳤다.
한 시간쯤 지나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하연은 이미 와 있었다. 오래된 병원의 정문 앞, 부서진 철제 펜스 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셨군요.”
“네. 그런데 여긴… 어떤 장소죠?”
“예전에 제가 입원했었던 곳이에요.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최근에 자꾸 이곳이 꿈에 나와서요.”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낡았지만 의외로 구조는 명확했다. 복도, 진료실, 병실, 그리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
그 계단 앞에서 우리는 동시에 멈췄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아래로 향하는 계단은 어둡고 축축해 보였다.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문… 파란 문, 여기에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손전등을 꺼내 켰다. 희미한 불빛이 계단 아래로 퍼졌다. 계단은 곧게 뻗어 있었고, 중간중간 타일이 깨져 있었다. 하연이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지하는 생각보다 깊었다. 몇 계단을 내려가자 습기 찬 냄새가 코를 찔렀고, 오래된 곰팡이 자국이 벽을 타고 번져 있었다.
아래층은 작은 방 하나뿐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고, 문짝에는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 사이로 희미한 파란 색깔이 보였다. 나는 손전등을 비춘 채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안쪽은 의외로 정갈했다. 오래된 책상 하나, 깨진 의자 하나, 그리고 벽에 붙은 거울.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연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문 옆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거울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였어요. 분명 여기였어요. 그 문은… 이 거울이었어요.”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거울. 파란 문이 곧 거울이었다면, 이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통로일 수 있었다. 다른 시간, 다른 정보, 다른 세계로의.
그 순간, 거울 표면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 보였다. 손전등을 비추자 표면이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하연이 거울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하연!”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손끝이 사라지던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마치 다른 주파수가 깃든 것처럼, 익숙하지 않은 웅음이 들려왔다.
나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거울이 다시 원래의 평면으로 돌아오며 그녀의 손이 튕겨져 나왔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봤죠? 그 문은… 아직 열려 있어요.”
나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손끝은 차가웠고, 눈동자는 여전히 거울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엔 두려움보다도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 안에… 무언가 있었어요. 아마… 우리를 알고 있는 존재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부족했지만, 공감은 선명했다. 이건 단순한 장치나 장난이 아니었다. 시스템이든 꿈이든, 그 안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우리는 그 방을 나와 계단을 다시 올라왔다. 병원 복도를 걸으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들어간 적이 있나요? 완전히 그 안으로?”
“어릴 적 한 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도 누가 날 끌어냈어요. 지금처럼.”
그녀의 말은 단순한 기억 같지 않았다. 마치 되풀이되는 구조처럼 들렸다. 나는 생각했다. 시스템이 만든 반복이라면, 그 안에서 벗어나는 방법 또한 존재할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바람이 불었고, 낡은 간판이 삐걱였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다시 길을 걸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조심하세요. 이 문이 열렸다는 건, 그쪽에서도 우리를 본다는 뜻일 수 있어요.”
나는 대답 대신 짧게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문은 열렸고, 무언가는 그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다시 그 꿈을 꾸었다. 이번엔 병원의 지하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검은 허공 속에 파란 문 하나만이 떠 있었다.
문은 조금 열린 상태였고, 안쪽에선 강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이번엔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직 안 돼.”
그 목소리는 분명 그 아이였다. 이번엔 한층 또렷했다. 나는 문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보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의 문은 점점 닫히기 시작했고, 안쪽의 빛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 순간, 꿈에서 깼다. 새벽 세 시.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그 문이 의미하는 바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의 상징이 아니라, 경고였다.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하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간단한 문장.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할 단서였다.
“오늘, 그 거울 다시 보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