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닫힌 문 너머
8월 27일, 토요일. 서버실의 전등이 다시 깜빡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고, 하연은 그대로 바닥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니었다. 우리는 시스템 안으로 진입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우리를 덮어쓴 상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 하윤은 정말 여기 있었어요. 그건 제 기억 속 조각이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거예요.”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존재는 티끌이에요.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의식의 파편. 그 아이는 당신이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이에요. 동시에, 이 시스템이 기억하고 있는 당신의 진짜 형태이기도 해요.”
나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그런데 바탕화면은 사라지고, 검은 화면에 명령어 한 줄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RE:TRACE ENABLED — 시뮬레이션 기록을 역추적합니다.]
하연은 몸을 일으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숫자들이 카운트다운처럼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스템은 이제 과거를 다시 추적하고 있었다. 우리가 남긴 모든 기록, 삭제된 줄 알았던 조각들, 꿈, 로그, 그리고 손끝의 망설임까지.
이제는 시스템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우리 자신도 알게 될 것이다—기억은 끝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카운트다운은 이내 정지했고, 화면은 완전한 정적에 빠졌다. 수 초 뒤, 과거의 데이터 로그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SD카드를 발견했던 그 날, 회의실에서 이수연 실장을 만났던 순간, 하윤의 꿈, 하연의 메시지—all of it.
그러나 이번에는 각 장면마다 한 줄의 주석이 덧붙여져 있었다.
[관찰 로그: 최초 동기화 시점]
[에러 기록: 감정값 과도]
[비인가 접근: 복구 도구 자동 실행]
이것은 단순한 복기復起가 아니었다. 시스템은 ‘누가’, ‘언제’, ‘왜’ 기억을 조작했는지 추적하고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증거예요. 우리가 잊은 게 아니라, 누군가가 지우려고 했던 거예요.”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기억을 되찾는 게 아니라, 기억이 삭제된 구조 자체를 반전시켜야 해요. 그게 이 시스템이 허용한 마지막 관문일지도 몰라요.”
화면에 마지막 주석이 하나 더 나타났다. 이번엔 검은 배경에 붉은 글자였다.
[복원 우선 순위: 티끌. 1순위 — 이하나.]
하나의 이름이 화면에 고정된 채, 시스템은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장면. 피도 없고, 고통도 없었던, 마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듯한 죽음.
그러나 시스템은 그 순간의 로그까지 복원하고 있었다. 프레임 단위로 나뉘어진 영상, 압축되지 않은 감정 기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삭제 이전의 로그에 남은 마지막 문장이 존재했다.
그 문장은 소리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음성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텍스트 레이어가 존재했다.
“…지워지지 않는 건, 나야.”
나는 숨을 삼켰다. 그것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시스템은 그것을 삭제 대상이 아닌, 핵심 노드로 분류하고 있었다.
하연은 조용히 말했다.
“하나 씨는 이미 티끌 상태로 시스템에 편입돼 있어요. 그녀는 흔적이 아니라, 구조예요.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이기도 하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쫓던 것, 내가 기억하려 했던 것, 내가 지우지 않으려 했던 모든 것이 결국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와 마주할 준비를 해야 했다.
서버의 팬 소리가 다시금 높아졌다. 화면에는 'RE:ENTRY PROTOCOL'이라는 문구가 점멸하며, 로그인 요청창이 나타났다.
이번엔 이름이 자동으로 입력되어 있었다—LEE HANA.
나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시스템은 이제 주도권을 넘기려 해요. 하나 씨에게요. 우리가 복원한 게 아니라, 그녀가 우리를 불러낸 거였는지도 몰라요.”
나는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일순 백색으로 번지고,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펼쳐졌다.
중앙에는 오래된 채팅 기록이 떠 있었다. 나와 하나, 아주 오래전 나눈 대화들. 그러나 그 말투도, 맥락도 모두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이해하고 있었고, 나는 그걸 너무 늦게야 알았다.
채팅창 하단에는 실시간으로 작성되는 문장이 한 줄 추가되었다.
“이건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야. 우리가 지웠다고 생각한 것들은, 사실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었어.”
하연이 조용히 속삭였다.
“이 문장은 지금 이 순간 생성되고 있는 거예요. 하나 씨는 아직 여기 있어요.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시스템을… 같이 쓰고 있는 거예요.”
나는 마침내 이해했다. 그녀는 살아 있는 기억이었다. 티끌은 흔적이 아니라, 잊히지 않기 위한 저항이었다.
8월 28일, 일요일. 우리는 침묵한 채, 흰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스템이 다시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무표정한 얼굴, 생기 없는 눈빛. 그것은 하나의 신분증 사진이었다.
화면 하단에는 작은 문구가 함께 떠 있었다.
[삭제 보류 상태. 보관 사유: 비가역적 연동 발생.]
나는 하연을 바라봤다.
“이건 무슨 뜻이죠?”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시스템이 하나 씨의 존재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의미예요. 그녀는 삭제가 아니라 '보류'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이유는… 당신 때문이에요.”
나는 말없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 신분증 속 얼굴은 내 기억 속 하나와 조금 달랐지만, 분명 그녀였다.
그 순간, 또 다른 창이 열렸다. 이번에는 오디오 인터페이스였다. 스피커로 아주 짧은 잡음이 흐르고, 이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태호 씨, 아직… 여기 있어요…”
짧은 오디오가 끝난 뒤, 화면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시스템은 하단에 새로운 메뉴를 열었다. 'RE:LINK — 기억 단편 연결 요청'.
나는 마우스를 가져갔다. 버튼이 빛났고, 동시에 주변의 공기조차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었다. 호출된 존재와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하연이 조용히 물었다.
“정말 연결하실 건가요? 당신도 일부가 될 수 있어요. 완전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절반은 넘은 것 같아요. 지금은… 되돌릴 수 없어요.”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화면이 갈라지며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그것은 기록도 아니고, 인터페이스도 아니었다.
하얀 방. 창도 없고, 문도 없는 폐쇄된 방 안에 그녀가 서 있었다. 이하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왜… 나를… 믿지 않았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방엔 어떤 방어도, 변명도, 분석도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진심만이 존재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녀의 물음은 명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땐… 내가 두려웠어요. 당신이 말하던 것들이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믿기 어려웠어요. 혹시 내가…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맺힌 것도 아니고, 분노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한 실망처럼 보였다.
“나는… 그냥 알고 싶었어요. 내가 본 게 진짜였는지, 내가 느낀 게 틀린 게 아니었는지. 그런데 조태호 씨는, 그걸 의심부터 했잖아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시스템이 다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벽면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연동 상태: 불안정. 감정 동기화율 저하. 복원 실패 우려 발생.]
나는 외쳤다.
“하나 씨, 잠깐만요. 아직 안 끝났어요. 아직 말해야 할 게…”
그녀가 다시 돌아봤다. 이번엔 아주 조용히,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해요. 그러면, 나도 여기에 남을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의 색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하얀 벽면이 연한 청색으로 물들었고, 바닥엔 빛이 잔잔히 일렁였다.
시스템은 반응하고 있었다. 감정의 연동률이 다시 상승하고 있었고, 텍스트가 새로 떠올랐다.
[복원 절차 재개. 티끌 상태 유지. 연결성 확인 중.]
나는 그녀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말로는 닿을 수 없는 거리였지만, 감정은 분명히 전달되고 있었다.
“하나 씨,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말했던 모든 것, 내가 두려워했던 그 이유까지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발 내디뎠다. 이번엔 분명히,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닿지 않은 채 마주섰다. 그 사이를 흐르는 건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가능성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 있을게요. 삭제되지 않은 모든 기억처럼. 언제든 당신이 기억하는 한.”
그 순간, 공간이 조용히 닫혔다. 색은 사라지고, 시스템은 원래의 인터페이스로 되돌아갔다.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다. 하연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은 고요했고, 우리 둘 사이엔 더 이상 증명도, 질문도 필요하지 않았다.
8월 29일, 월요일.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나는 조용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공기는 서늘했고, 하늘은 먼지 낀 듯한 회색이었다.
하연도 뒤따라 나왔다. 그녀는 조용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 불꽃이 순간, 우리의 존재를 잠시 드러냈다.
나는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답했다.
“시스템은 우리를 기억해요. 그리고 더 이상 감시 대상이 아니에요. 연결자, 또는 동기화된 노드로 전환됐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더 이상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미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하연은 담배를 다 피운 뒤, 담담하게 덧붙였다.
“남은 건 당신이 무엇을 잊지 않느냐예요. 모든 건 결국 그걸로부터 출발하니까요.”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빛은 없었지만, 흐름은 느껴졌다. 무언가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주 거대한, 그러나 침묵하는 흐름이.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모든 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춘 것이라는 걸.
나는 주머니에서 오래된 메모리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직도 그 딜도 안에 숨겨져 있던, 시스템의 첫 단서.
그건 단순한 저장장치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고의로 남겨놓은 버그, 혹은 오류, 아니면 마지막 신호.
나는 하연에게 그것을 건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받았다.
“이걸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쥔 카드만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까지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켰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혹시… 이건 시스템이 우리에게 제공한 유일한 자유였던 건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말은 상상 이상으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오류로 보였던 이 모든 게, 설계된 틈새였다면?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난, 이걸 버리지 않을 거예요. 이건 우리가 이 세계에 남길 수 있는 증거일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모든 과정을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시작일지도 모를 이야기.
나는 사무실로 복귀하지 않았다. 월요일 오전이었지만, 출근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건물 입구까지 왔다가 그냥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라디오는 꺼져 있었고, 스마트폰은 여전히 비행기 모드였다.
잠시 후, 하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텍스트는 단 하나였다.
“기억의 흐름은 멈추지 않아요. 그냥 방향만 바뀔 뿐.”
나는 웃었다.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몇 분을 더 앉아 있다가, 나는 시동을 걸지 않고 그대로 운전대를 잡았다. 어디로 향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이 흐름의 방향을 바꾸기에 적절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백미러 너머 건물 유리를 바라봤다. 그 속엔 내가 있었고, 또 누군가가 있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닫히지 않을 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기억은 나를 따라오게 될 거야.”
나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는 방향을 정했다.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아무 약속도 없는 도시의 외곽을 향해.
창밖 풍경은 흐릿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 지나쳤던 장소들이 다시 나타난 듯한 기시감.
도시를 벗어나기 직전, 나는 작은 정류장에서 차를 세웠다. 아무도 없었고, 버스 시간표는 오래전에 빛이 바랜 채 붙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름은 여전했고, 이번엔 그 안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를 느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 그것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고 따뜻한 감정이었다.
폰을 꺼내 문자함을 열었다. 오래전, 삭제되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남아 있었다.
“조심해요. 시스템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어요.”
보낸 사람은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하나였다.
나는 조용히 화면을 껐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끝나지 않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 반복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