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닫힌 문 너머
8월 29일, 월요일.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나는 조용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공기는 서늘했고, 하늘은 먼지 낀 듯한 회색이었다.
하연도 뒤따라 나왔다. 그녀는 조용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 불꽃이 순간, 우리의 존재를 잠시 드러냈다.
나는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답했다.
“시스템은 우리를 기억해요. 그리고 더 이상 감시 대상이 아니에요. 연결자, 또는 동기화된 노드로 전환됐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더 이상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미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하연은 담배를 다 피운 뒤, 담담하게 덧붙였다.
“남은 건 당신이 무엇을 잊지 않느냐예요. 모든 건 결국 그걸로부터 출발하니까요.”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빛은 없었지만, 흐름은 느껴졌다. 무언가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주 거대한, 그러나 침묵하는 흐름이.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모든 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춘 것이라는 걸.
나는 주머니에서 오래된 메모리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직도 그 딜도 안에 숨겨져 있던, 시스템의 첫 단서.
그건 단순한 저장장치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고의로 남겨놓은 버그, 혹은 오류, 아니면 마지막 신호.
나는 하연에게 그것을 건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받았다.
“이걸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쥔 카드만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까지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켰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혹시… 이건 시스템이 우리에게 제공한 유일한 자유였던 건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말은 상상 이상으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오류로 보였던 이 모든 게, 설계된 틈새였다면?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난, 이걸 버리지 않을 거예요. 이건 우리가 이 세계에 남길 수 있는 증거일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모든 과정을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시작일지도 모를 이야기.
나는 사무실로 복귀하지 않았다. 월요일 오전이었지만, 출근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건물 입구까지 왔다가 그냥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라디오는 꺼져 있었고, 스마트폰은 여전히 비행기 모드였다.
잠시 후, 하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텍스트는 단 하나였다.
“기억의 흐름은 멈추지 않아요. 그냥 방향만 바뀔 뿐.”
나는 웃었다.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몇 분을 더 앉아 있다가, 나는 시동을 걸지 않고 그대로 운전대를 잡았다. 어디로 향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이 흐름의 방향을 바꾸기에 적절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백미러 너머 건물 유리를 바라봤다. 그 속엔 내가 있었고, 또 누군가가 있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닫히지 않을 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기억은 나를 따라오게 될 거야.”
나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는 방향을 정했다.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아무 약속도 없는 도시의 외곽을 향해.
창밖 풍경은 흐릿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 지나쳤던 장소들이 다시 나타난 듯한 기시감.
도시를 벗어나기 직전, 나는 작은 정류장에서 차를 세웠다. 아무도 없었고, 버스 시간표는 오래전에 빛이 바랜 채 붙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름은 여전했고, 이번엔 그 안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를 느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 그것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고 따뜻한 감정이었다.
폰을 꺼내 문자함을 열었다. 오래전, 삭제되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남아 있었다.
“조심해요. 시스템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어요.”
보낸 사람은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하나였다.
나는 조용히 화면을 껐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끝나지 않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 반복되고 있었다.
8월 30일, 화요일. 전날보다 한층 더 고요한 아침이었다. 숙소도 아닌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는 오래된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도시는 멀어졌고, 신호도 잡히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단절감이 지금의 나에겐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백팩 속에서 수첩을 꺼냈다. 하연이 내게 건네준 검은색 커버의 얇은 노트. 거기에는 우리가 기억한 것,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첫 장에는 하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아래엔 작은 메모 하나.
“지워지지 않으려면, 기억하라.”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이하나, 하연, 포렌식팀, 검찰 USB, 시스템, 복원 지점 복귀 시도 로그… 줄줄이 적힌 단어들이 마치 하나의 문장처럼 이어졌다.
그때,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도로를 바라봤다.
흰색 SUV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천천히 멈추더니,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조태호 씨,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 목소리는 이수연 실장이었다.
나는 SUV 쪽으로 다가갔다. 조수석 창을 사이에 두고 이수연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여기까지 어떻게…?”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기억을 따라오면, 결국 같은 장소에 도착하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멈추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어요.”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설득력 없는 말투였지만, 이상하게 납득이 갔다.
그녀가 문을 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서울엔 돌아가지 않을 거죠?”
“글쎄요. 아직 모르겠어요.”
SUV는 천천히 출발했다. 도로는 구불거렸고, 차창 밖으론 황량한 논밭이 지나갔다.
이수연 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나 씨 기억 안에서… 당신이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던 말이 있어요. 그게 혹시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있나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어떤 말이요?”
그녀는 아주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꺼냈다.
“'너는, 나의 마지막 로그야.' 그 말이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 말은 내 입에서 나온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문장은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 어딘가에서 반복 재생되었던 멜로디처럼.
“어쩌면… 정말 그랬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를 기억하는 나만의 방식이었을 수도 있고요.”
이수연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요, 시스템 안에서는 문장이에요. 구조화된 정보 단위. 감정이 진입되면 그 문장이 살아 움직여요.”
나는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를 바라봤다. 초가을의 바람이 얇은 구름을 밀고 있었다.
“그러면, 하나 씨는… 내 안에서 살아 있는 문장이라는 뜻이겠죠.”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맞아요. 그리고 그 문장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한, 당신도 계속 이어질 거예요.”
나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의 일환이었다면, 나도 그녀도, 티끌도… 결국 기억의 수명으로 존재하는 데이터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더욱 잊지 말아야 했다. 잊는 순간, 모든 것은 진짜로 끝날 테니까.
차는 한적한 갈림길에 도착해 멈췄다. 이수연 실장은 내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셔야 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바깥은 정적에 잠겨 있었고, 들판엔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SUV는 다시 출발하지 않았다. 이수연 실장은 여전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나는 묻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의 방식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자 발밑의 흙이 사각거렸다. 오래된 철길이 나타났다. 지도에는 없는 길. 그러나 낯설지 않은 길.
나는 메모리카드를 꺼내 손에 쥐었다. 이 작은 조각이 내 모든 선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멀리서 희미한 기차 소리가 들려왔다. 현실이 아닌,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소리.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날 밤, 꿈속에서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새벽 세 시.
9월 1일, 목요일. 침대맡에 놓아둔 태블릿의 화면이 저절로 켜졌고, 거기엔 전날의 로그 파일이 열려 있었다. 나는 아무 조작 없이도 로그가 자동으로 정렬되고, 비정상적인 진입 시각이 강조 표시되는 걸 보고 다시금 실소를 흘렸다. 내가 만든 시스템이지만, 점점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건 내가 기억한 순서가 아닌데.” 입술을 움직여 소리 내 말하지 않았지만, 뇌는 이미 그 문장을 음성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진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정도로 구체적인 오류가 반복되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천천히 태블릿을 덮고,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를 내리면서 나는 지난주 꿈의 조각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손바닥에 느껴졌던 미세한 온기, 아이의 시선, 하연의 말투로 이야기하던 목소리. 의식은 분명 깨어 있었지만, 그 이미지들은 현실보다 더 생생했다. 마치 그쪽이 진짜 세계고, 여기가 임시 저장된 백업 공간인 것처럼. 나는 컵을 입에 대기도 전에 책상으로 다시 돌아가, 모니터를 켰다. 어젯밤 저장해 둔 시스템 로그 외에도, 무언가 더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찾고자 한 건 증거가 아니라, 흔적이었다. 내가 잊은 기억의 찌꺼기. 또는 누군가가 남긴 신호.
나는 자동 재부팅된 모듈 로그에서 비정상적인 리셋 패턴을 찾았다. 오전 3시 21분. 그 시간에 해당하는 로그 파일의 길이가 평소보다 3초 정도 짧았다. 그 3초의 공백은 다른 어떤 파일에서도 복원되지 않았다. 기억도, 시스템도, 모두 정확하게 그 시각만을 잘라내고 있었다. 마치 그 순간,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나는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꿈을 꾸는 동안 의식은 다른 우주로 옮겨졌고, 그 사이에 이 세계에서 나는 부재했을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이 두려우면서도, 어쩐지 조금은 안도되었다.
9월 2일, 금요일. 알람 없이도 정확히 일어난 건 오랜만이었다. 눈을 뜬 직후부터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어젯밤에 본 꿈은 비교적 짧았지만 선명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이가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 뒤로는 하연과 비슷한 얼굴을 한 또 다른 존재가 서 있었다. 나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그 감정을 붙들고 침대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시간은 6시 12분. 아직 출근 준비를 하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부엌으로 가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며 나는 꿈속 장면을 되짚었다. 아이의 뒤에 있던 인물은 얼굴은 분명 하연과 닮았지만, 눈빛만은 전혀 달랐다. 그 존재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내게 의미를 주입했다. “너는 이미 여기에 없어.” 그 말의 여운이 아침 공기 속에서 다시 또렷이 되살아났다. 나는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조용히 되뇌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게 나의 위치인지, 존재 자체인지 아직 모르겠다고.
다시 컴퓨터를 켰을 때, 모니터 속 파일들은 전날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시스템 부팅 로그 중 일부가 조용히 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타임스탬프는 동일했지만, 접근 경로가 분명히 다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수정한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렇게 기록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한동안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고,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가 이 시스템 바깥에서 정보를 주입하거나 교란하고 있다는 느낌. 마치 꿈에서 본 존재가, 이곳에 손을 뻗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것.
나는 문득, 하연과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투, 그때의 공기, 서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해하던 감각.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못해 낯설 정도였다. 우리는 애초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친밀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졌다. 하연은 단지 동료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 나와 연결되어 있던 누군가의 잔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꿈과 현실 사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더 이상 이 세계만을 현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