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 01
1986년 8월 10일 일요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인근의 한인타운에 자리한 작은 종합병원에서 아이가 첫울음을 터뜨렸다. 산모의 곁에 있던 간호사가 “아름다운 여자아이”라고 속삭였고, 그 순간 지숙의 눈에는 세상이 환히 트이는 듯한 빛이 들어왔다. 아이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배 속에서 꼬물거리던 태동을 느끼던 무렵부터 ‘진아’라 불러왔기에, 가족 모두에게 그 이름은 이미 낯설지 않았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정식으로 호적에 올라 ‘진아’가 되었고, 산후의 고통보다도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는 기쁨이 지숙을 더 뜨겁게 적셨다.
사실 만삭의 몸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오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남편은 끝까지 반대했고, 양가 부모들도 “차라리 한국에서 편안히 낳아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먼 타국에서 달포 넘게 지내며 출산을 한다는 건 위험이 크고, 아무리 한국에서 윤택한 축에 드는 집안에게도 미국의 병원비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지숙의 뜻은 굳건했다. 아이에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미국 국적을 안겨 주는 길이 바로 이 선택이라는 것을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오히려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며느리가 힘들다며 꺼려도, 손주의 미국 여권을 위해 기꺼이 돈을 대고, 심지어 갖가지 선물을 안겨 보내며 등을 떠미는 시댁이나 친정도 흔했다. 그런 이야기를 익히 들어온 가족들은, 정작 지숙이 먼저 “출산여행을 가겠다” 선언했을 때는 더 이상 목청 높여 반대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걱정스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몇몇은 오히려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지숙의 결심은 단호했다.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느꼈다. 산부인과의 영상의학과에서 분홍색 아기 옷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던 날, 그녀는 곧장 가족 앞에서 출산여행을 선언했다. 만약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집안의 압박과 기대로 인해 자신이 선택의 여지없이 흔들렸을 것임을 지숙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딸이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오히려 자유를 주었고, 스스로 길을 개척할 용기를 주었다.
출산은 순조로웠다. 병실 창가 너머로는 뜨거운 여름 햇빛이 로스앤젤레스의 도심을 반짝이게 했고, 한인타운 거리의 한국어 간판들이 희미한 푸른빛 속에서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언어를 쓰는 의료진에게 몸을 맡기는 일은 두려웠지만,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다. 마취제의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와중에도 지숙은 의식의 중심에 선명히 새겨 넣었다. “이 아이는 진아, 내 딸.”
출생신고를 마친 지숙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미국의 생활이 달포를 넘기면서 몸은 이미 지쳐 있었고, 그녀는 진작부터 생각해 둔 대로 출산 직후 곧장 귀국을 결정했다.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며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기보다는, 한국에서 친정과 시댁의 보살핌을 받으며 전통 산후조리를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굳게 믿었다. 비행기 표는 이미 남편이 준비해 두었고,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일등석에 몸을 싣고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비행 내내 기내식의 냄새조차 제대로 느낄 새 없이 아이의 숨결에 귀를 기울였고, 착륙 순간 그녀의 눈에는 고향 산하가 뚜렷이 들어왔다.
진아는 태어나자마자 풍족한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먹이고 씻기고 잠을 재우는 대부분의 일은 보육 도우미가 맡았다. 젊은 부부에게는 그러한 선택이 낯설지 않았다. 대신 지숙은 아이를 돌보는 사소한 일상에서 벗어난 만큼, 오롯이 사랑을 전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밤마다 아기를 품에 안고 자장가를 흥얼거릴 때, 지숙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부드러웠다. 젖은 도우미의 손길로도 충분히 해결되었지만, 아이를 바라보며 “내 딸, 내 진아”라고 속삭일 때면 세상의 어떤 피로도 단숨에 가셨다.
이렇듯 진아는 태어나면서부터 미국 여권을 손에 쥔 ‘해외 출생자’로서의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았고, 동시에 엄마의 절대적인 애정 속에서 자라났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을 듬뿍 안겨주는 존재였다. 어린 진아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품은 늘 향기롭고 따스한 안식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