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월요일의 그와 일요일의 그녀

태수 03

by 융 Jung

태수 03

 서울이라는 도시는, 한 나라의 수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웅장하고도 번잡했다. 태수는 열차역에 내려서는 순간 사방으로 뻗은 도로와 그 위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행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산골에서 흙냄새와 바람 소리를 벗 삼아 지내던 소년에게, 전깃불이 끝없이 반짝이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쉴 새 없이 오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다른 세계였다. 골목마다 빽빽이 서 있는 전봇대에는 전화선과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상점마다 번쩍거리는 간판들이 내걸려 있어 태수는 고개를 젖힌 채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첫눈에 화려했던 인상은 금세 사라졌다. 서울살이 첫 보금자리는 양옥집의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태수가 떠나온 고향집은 비록 반쯤 허물어져 있었지만, 기와 대신 얹힌 슬레이트 지붕이 비를 막아주었고, 높은 댓돌 위 대청마루에 앉아 내리는 빗줄기를 운치 있게 지켜볼 수 있었다. 여름밤이면 귀뚜라미 소리가 마당을 채우고, 겨울이면 온돌 불길이 방바닥을 뜨겁게 덥혔다. 그런 집을 떠나와 마주한 반지하 단칸방은 삭막하기만 했다.

 방 한쪽에 달린 창문은 가로로는 길었으나 세로로는 이상하리만큼 짧았다. 의자라도 밟아 올라서야 손이 닿을 만큼 높은 곳에 달려 있어, 태수가 제 힘으로는 마음껏 여닫을 수 없었다. 낮에도 방 안은 음습하고 어두웠으며, 장마철이면 곰팡이 냄새가 벽지 틈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창문이 달려 있다는 이유 하나로 ‘지하’가 아니라 ‘반지하’라 불렸을 뿐, 태수의 눈에는 여전히 땅속 같은 공간이었다.

 화변기가 있는 화장실은 마당 구석에 따로 있었고, 세면대나 목욕실은 따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우산을 써야 했고, 어린 태수는 그 길이 두려웠다. 때로는 요의를 참아야 했고, 갈증을 느껴도 일부러 물을 적게 마시려 했다. 씻는 일은 부엌을 겸한 좁은 통로의 수도꼭지 앞에서 해결해야 했다. 태수는 그곳에 쪼그려 앉아 세수를 했고, 온몸을 씻을 때면 간유리문을 등지고 서야 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저녁이면 간유리 너머로 윤곽이 비쳐, 누가 씻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태수에게 목욕은 늘 불편과 수치가 뒤섞인 일이었다.

 마당의 석류나무뿌리가 자리한 즈음의 지하에서 태수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 반면, 나무의 꼭대기와 나란하여 해가 잘 드는 윗집에는 집주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집주인의 장남 종만은 태수와 같은 반이었는데, 그 존재는 태수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겼다. 종만은 틈만 나면 “촌놈”이라 부르고, 때로는 “거지”라며 놀렸다. 같은 또래이지만, 집주인의 아들이라는 위치에서 종만은 마치 태수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학교에서도, 놀이터에서도 그는 태수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줄을 설 때마다 뒤로 물러나라고 강요했다.

 태수는 씻는 일을 더욱 기피하게 되었다. 아무리 머리를 감아도 머릿니는 사라지지 않았고, 종만은 그 사실을 온 동네 아이들에게 떠벌렸다. 맨몸을 들키는 것도 싫었고, 씻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은 태수의 마음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결국 3학년 2학기, 문제는 터졌다. 어느 날 한 학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큰소리를 냈다. 자기 아이가 머릿니가 있는 아이와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을 수는 없다며, 차라리 자기 아이를 다른 반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태수를 옮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무실에 울려 퍼진 그 소리는 곧장 아이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그날 이후 태수는 한 반을 넘어 같은 학년 전체의 기피 대상이 되었다. 급식 줄에서는 아이들이 슬며시 자리를 비켜섰고, 책상을 붙여 앉는 것도 꺼렸다. 복도를 지나가면 수군거림이 따라붙었고, 교실 안 태수의 자리는 점점 더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아이들이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반장이었던 홍주와 그녀의 단짝 소연은 달랐다. 홍주는 언제나 성실하고 반듯한 아이였는데, 그만큼이나 약자를 감싸는 성품을 지녔다. 소연은 말수가 적고 조용했지만, 홍주의 곁에서 묵묵히 힘을 보탰다. 두 소녀는 쉬는 시간마다 태수에게 다가와 함께 놀자고 했고, 그 작은 친절은 태수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따돌림으로 움츠러든 마음속에 따뜻한 불빛이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태수는 그제야 이 낯선 도시에서도 자신을 바라봐 주는 눈길이 있다는 사실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계속…….

keyword
이전 04화월요일의 그와 일요일의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