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무진기행>은 1964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무능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나’ 윤회중이 무진에 머무른 2박 3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윤회중을 둘러싼 각각의 개성 있는 3명의 인물들로 하여금 이야기가 전개된다.
윤회중은 아내의 권유로 인해 무진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서울에서 실패를 겪어 도망치고 싶을 때 가끔 내려왔었지만 이제는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번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면 제약회사의 전무님의 자리에 오를 만큼 성공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어머니에 의해 골방에 갇혀 있던 점, 원래 다니던 제약회사가 합병되어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 저항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매우 소극적이라 할 수 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해봤을 반항을 하지 않고, 삶에 대한 불편 없이 지고지순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에선 제약회사에 다니는 주인공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수면제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작중 내용인 ‘햇빛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 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문장 내에서 이질감이 들었다. 조용히 잠든다는 걸 상쾌한 일이라고 표현하였는데 보통은 일어났을 때 상쾌하다고 하지, 잠잘 때 특히 약을 먹고 잠이 들 때 상쾌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서 난 조용히 잠든다는 게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다. 중반부에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여성의 시체가 나온다. 수면제와 청산가리가 연결점이 되어 ‘햇빛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를 합성하여 수면제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러나 사실 그 수면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게 아닐까’를 통해서 유추가 가능하다.
윤희중은 이 여성의 죽음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잠에 들지 못했고, 나의 일부처럼 느꼈다고 한다. 윤희중이 무진에 머무르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에서 제삼자인 여성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등장시킨 건 아닐 것이다. 여성은 어떻게 보면 윤희중의 망상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렇다는 말은 망상을 행동으로 옮겼다면 죽음을 겪는 게 여성이 아닌 주인공인 윤희중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스스로가 묘한 동질감을 느껴 일부처럼 느낀 것이 아닐까.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조’는 중학교 동기로 윤희중에게 오래전부터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 세무서장으로 성공한 삶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러워하기는커녕, 초라하고 가엾게 봤다. 다른 인물들의 감정을 이해는 아니더라도 동질감을 느끼는 ‘나’가 유일하게 초라하게 보는 인물이다. '조'라는 인물은 자기 과시에 대한 면모만 없다면, 오히려 윤희중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조’의 바쁜 모습으로 인해 서울에서의 나라고 말하지만, 바쁜 것만 똑같은 것일 뿐, 따져보면 본질적으로 다르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하라는 대로 끌려 다니며 아내의 도움으로 성공한 나에 비해 성공만 바라보고 패기 있게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주인공 시점이 아닌 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때, 조가 주인공으로 전개되었다면 오히려 이야기와 갈등양상이 더욱 흥미로웠을 수도 있다. 흥부와 놀부에서 자수성가한 놀부라며 재평가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조에 대해서도 주인공의 관점으로 초라하고 가엾게 흘러가지 말고 재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시대엔 윤희중이 아닌 '조'처럼 욕심 있고 목표가 뚜렷한 사람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윤희중은 쓸쓸할 때마다 편지를 쓰면서 감정을 표출했다. 편지로 하여금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편지 쓰는 일을 반복했다. ‘쓸쓸하다’라는 단어가 천박하다고 느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쓸쓸하다’였기에 자주 사용했다. 반복해서 쓰는 편지는 감정을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힘듦과 분노, 슬픔과 고통을 편지를 사용해 표출한 것이다. 작품에서의 많은 편지들은 진심이 전달되지 못한다. 사무적 정보만 담긴 아내의 전보 딱 하나만 빼고 말이다. 이에 대해 진심이 담긴 편지는 전달되지 못하고 정보만 담긴 편지만 전달된다는 모습에서 의도가 무엇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인숙에게 느꼈던 감정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하인숙이 무진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모습에서 윤희중은 자신이 무진을 벗어나려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 모습에 처음 보는 인물이어도 연민을 느끼고, 훨씬 정이 갔을 것이다. 둘의 대화를 통해 개구리울음소리가 ‘열두 시 이후에 우는’ 개구리울음소리로 형용사가 생긴 점에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하인숙의 말을 새겨듣고, 그녀의 행동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가도 이내 만나고 싶어 하는 행동과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모습에서 과거 좋아했던 연인인 ‘희’와 같은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 가기 싫다고 말하는 하인숙에게 별 수 없이 내게 끌려서 서울을 오게 될 거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하인숙은 윤희중을 이용해 서울을 가고자 했지만, ‘나’는 하인숙과 서울에서도 함께 있고 싶었음이 보인다. 자신의 의지 없이 무기력하게 지내는 ‘나’가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건, 전과는 달리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며, 그만큼 진심이었음이 나타난다.
하지만, 마지막에서 아내의 전보로 인해 하인숙에게 줄 편지도 찢은 채 돌아가는 모습에선 꿈처럼 무진 생활 속에서의 환상은 끝나고 현실로 돌아간다. 전보를 무시하거나 하인숙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면 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발악으로 보였겠지만, 결국 현실을 포기 못한 채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문구와 함께 서울로 가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건 무진에서의 일을 회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진에서의 2박 3일은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과거로의 상처로부터 무진과 하인숙의 아름다움으로 회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딱 거기까지였던 거다. 그러나 현실로 끌고 오기엔 버겁고 힘들어 외면을 택한 윤희중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무진기행>은 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해 나가는데, 단편이지만 인물별로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있는 게 적게나마 묘사되었다는 점이 이해를 이끌어낸다. 또한 만약에 내가 윤희중이었더라면 과연 현실과 꿈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이 현실적이라서 마냥 주인공에 대한 비판만 할 수 없다는 점이 어쩐지 쓸쓸하게 다가온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