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밀양> + <벌레이야기>
원작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관찰하면서 겪은 경험을 일기로 기록하듯이 쓴 소설 형식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마치 <벌레 이야기>이라는 작품은 문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라 <엄마를 부탁해>라는 작품도 떠오르게 했다. 나의 이야기지만 마치 남의 이야기를 대신 말하는 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밀양>에서는 엄마인 신애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치 관객들이 신애의 일상을 지켜보는 형식을 띤다. 또한 단편소설을 장편영화로 바꿔서 그런지 이야기가 훨씬 구체적이고 아이를 잃은 부모로서의 감정 변화가 더욱 극대화되어서 나타난 거 같다.
<밀양>은 주인공 신애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겪는 이야기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던 신애는 밀양에서 아들마저 잃게 되고, 그 충격 속에서 종교에 의지하며 지내지만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다.
난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에 의문증이 생긴다. 밀양으로 온 이유가 남들에게는 남편의 고향이라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친동생에게는 아는 사람이 없어 새로 시작하겠다고 한다. 만약에 나라면 남편 고향이 아닌 정들고 익숙한 내 고향에서 안정을 얻고자 했을 거 같은데, 왜 남편의 고향으로 가게 된 걸까. 아는 사람 없이 새로 시작하려 했다면, 전혀 알지 못했던 지역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새로 시작한다는 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남편을 통해 고향인 ‘밀양’에 관한 이야기를 간혹 들었을 것이고 그곳에 관한 호기심은 생길 수 있지만 듣다 보면 알게 모르게 친숙해져 새로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강하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난 친동생에게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을까 싶다. 둘의 대화에서 친동생은 남편에 대해 바람을 폈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다지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새로 시작하는 게 맞을 수도 있지만,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했던 걸 수도 있다. 혹은 밀양에서 아들 준이를 남편처럼 같은 환경에 키우게 되더라도 남편과는 다르게 클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다음으로 궁금했던 건 아들의 이름인 ‘준’의 의미이다. <벌레이야기>에서는 ‘알암’이었지만, 준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학원 이름은 ‘준 피아노’였는데, 여기서 준은 종찬의 통화 내용을 통해 6월의 영어 ‘June’ 임을 알 수 있다. 학원 이름은 보통 자신과 관련된 것으로 지으니 자식인 준도 6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June’의 의미를 찾아보았는데 ‘젊은이’의 라틴어라고 한다. 그 외에는 찾기 어려웠다. '젊은이'의 반대는 늙은이이다. 이는 어쩌면, 결국엔 늙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으로 젊게 끝나버린 삶의 복선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또한 밀양이 가진 뜻도 무언가의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라 본다. 한자로 密陽라 하는데 맨 처음 신애가 종찬의 차를 타고 가면서 밀양의 뜻을 ‘비밀의 볕’이라 알려준다. 햇볕이면 햇볕인거지 왜 비밀이라는 말도 덧붙이는 걸까. 그것을 알려주듯 영화가 진행되면서 햇볕을 째는 모습이 자주 비친다. 추측해 보건대, 처음의 비밀의 볕은 하나님의 구원, 손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밀양으로 이사 가던 중 차가 고장 나 종찬을 기다리면서 신애와 준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햇볕 아래에서 장난을 치다가 나중엔 그늘에서 쉬는 모습을 통해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다가 피아노 학원 앞 쪽에 위치한 약국에서 교회에 대한 권유를 받게 되고, 약사가 저기 비치고 있는 햇빛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신애와 약사는 논쟁을 하게 된다. 신애는 단순한 햇빛이라 하며 말을 외면하지만 결국 나중에 신애는 기독교를 믿게 되고, 그 후에 종교적 활동을 진행할 때마다 날씨가 화창하다. 그래서 신애는 하나님의 구원 아래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엔 이 햇볕은 신애에게 배신감을 가져다주었고, 더더욱 좌절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도 종찬은 언제나 신애 옆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그리곤 신애가 완전히 망가지지 않도록 지지해 준다. 그렇다는 건 비밀의 볕인 밀양은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라 종찬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신애라는 사람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비춰주고 있었고, 신애한테 만큼은 따뜻했기에 종찬은 신애만의 비밀스러운 햇볕이라고 볼 수 있다.
후반부에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신애는 병원 치료를 받고 퇴원을 하게 된다.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점차 상처와 고통 속에서 극복해나가려고 한다. 그것은 마지막 신애가 머리를 자르다가 화면 전환으로 정원을 비추는 햇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햇볕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이나 손길이 아닌, 사람들을 통해서 희망을 엿볼 수 있으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도 그럴게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다가 뛰쳐나온 신애를 보게 된 이웃이 먼저 말을 걸고 덕분이라는 말과 살인범의 딸이지만 먼저 말을 걸고 노력하는 모습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고 변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코 고는 걸 따라 했던 장면이다. 준이가 사라지기 전, 준이는 아빠가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에 아빠가 코 골았던 모습을 따라 하고는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외로움을 억누르고 했다. 근데 준이가 사라지고 난 후, 신애가 코 고는 모습을 따라 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 했던 준이의 행동을 신애가 한 것이다. 이것은 이때 나의 버팀목이 없다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지만. 하나 남은 소중한 사람인 준이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표현이 더 정확한 거 같다. 준이마저 사라졌다는 걸 믿고 싶지 않다는 현실을 외면한 행동 표현 같았다. 단순하게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이 아이에서 엄마로 이어진다는 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거 같다.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하면 그 사람에 대한 물건이나 사진을 보는 걸로 끝낼 수도 있을 텐데 행동을 따라 한다는 게 신박했다.
<벌레 이야기>도 <밀양>의 원작이라 그런지 내용이 유사했다. 알암이가 실종돼서 결국 죽은 상태로 발견하자 아내는 범인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이불가게를 하는 김집사를 통해 종교를 권유받고 서서히 회복되는 듯했으나 결국 자살을 하고 마는 이야기이다.
난 제목이 <벌레 이야기>라는 것에 궁금증이 생겼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시피 아내의 이야기를 풀어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는 건 벌레 이야기가 아내 이야기가 된다는 건데, 벌레라는 건 좋은 이미지도 다가오진 않는다. 아내를 벌레로 표현한 건 나로서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보이진 않고 오히려, 누가 나에게 벌레라고 한다면 썩 좋은 반응은 하지 못할 듯하다. 하물며 남편이 나를 벌레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았는데, 알에서 태어나 벌레로 지내다가 곤충으로 진화를 하거나 혹은 벌레 상태에서 삶을 마감해 버리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그러니 아내가 자살을 하고 마는 모습이 곤충으로 되지 못하고 벌레로서 죽어버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충분히 곤충으로 될 수 있었고 희망도 보였으나 누군가에게 밟혀 죽어버린 벌레처럼 아내도 자살이었지만, 하나님과 살인범에 의한 타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내는 알암이가 사라졌을 때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희망을 가졌다.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요구하는 것도 들어줄 테니 알암이만 무사히 돌려보내달라고 했었다. 최선을 다했고 무너지지 않으려 했다. 알암이가 죽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부모가 그렇듯 자식이 죽어서 돌아왔을 때, 무너지고 나약해졌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살인범에 대한 복수를 불태웠고 그가 처참하게 망가지길 바랐다. 이렇게 알 수 있듯 아내는 무언가 하나에 몰두하면 그거에만 정신이 쏠렸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랬던 아내가 살인범의 면회 이후 패닉 상태가 되었다는 건 그만큼의 충격이 컸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무기력감도 들었을 것이다. 이미 살인범이 용서를 받았는데,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으랴. 아내를 완전히 망가지게 한 건 알암이의 죽음도 분명 있었겠지만. 살인범의 태도와 그에 대한 마지막 동아줄이었던 하나님의 믿음 붕괴가 더 컸다.
아내를 결정적으로 죽게 만든 라디오에서 들렸던 살인범의 대한 발언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평범한 가정을 파탄시킨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로 인도받을 것이며, 가정에게도 고통을 덜어달라고 말하는데 그게 지금 할 말인가 싶었다. 누구 때문에 삶이 망가지게 되었는데, 당사자가 할 말인가? 충격적이고 어이가 없었다. 과연 그런 사람에게도 자비와 용서가 필요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벌레 이야기>에서는 아내의 곁에 남편이 있고, <밀양>에서는 신애의 곁에 종찬이 지킨다. 남편과 종찬을 보고 느낀 점이 있다면, 둘의 행동은 소극적과 적극적의 대조라는 것이다. 아내의 곁에 남편이 있지만 그는 그저 묵묵하게 옆에서 관찰할 뿐, 무언가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진 않는다. 오히려 김집사에게 잘 부탁한다고 한다. 사실은 남편은 이미 죽고 귀신이 되어 지켜보는 건 아닐까 싶은 정도이다. 아내도 자신이 한 결정에 대한 의논을 남편이 아닌 김집사와 한다는 점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맞나 싶었다. 반면에 종찬은 신애에게 오지랖을 부리고 부탁도 안 했는데 계속해서 도와주려고 한다. 밀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병원에서 퇴원할 때까지 신애의 옆에 있고 의지하도록 만든다.
단순하게 둘의 성격차이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용하다고 해서 누군가를 도와주지 않거나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게 아니다. 그래서 둘의 차이를 다시 보면 사랑의 정도 차이가 아닌가 싶다. 남편은 아내와 결혼을 했고 알암이가 4학년인 11살이라는 점은 감안했을 때 최소 11년의 부부 생활을 지속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랑이 식는 건 아니지만, 처음보다는 무뎌졌을 것이다. 종찬은 신애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관심을 가졌고 그렇기에 신애의 관심을 얻고자 원하지도 않은 도움을 주고 어쩌면 선을 넘었다 싶을 만큼 행동을 한다. 막 사랑에 빠진 종찬은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애와의 연애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기에 도움이 되고 싶어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그 차이로 둘의 행동이 달랐던 건 아닌지 추측해 본다.
더불어 말해보자면 종찬과 준은 실질적으로 관계는 없다. 얼굴을 아는 정도였으니 죽었다는 소식으로 슬퍼했을 수는 있지만 그뿐이다. <벌레 이야기>에서 남편은 친아들을 잃은 셈이니 마냥 밝고 쾌활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 관계의 차이도 있었을 듯싶다.
용서와 구원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봐야 한다. <벌레 이야기>에서 인간에겐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는 건 하나님 한 분뿐이며, 사람에겐 오직 남을 용서할 권리밖에 없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복선이 되어 아내가 면회를 가 살인범을 용서하려고 했으나 이미 용서받았다고 한다. <밀양>에서도 틀이 유사하다. 하나님에게 깨달음을 얻은 신애는 용서를 하려고 하지만 이미 용서를 받았고 표정은 많이 평온했다. 충격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아내는 자살하며 끝나지만, 신애는 곁을 지켜주는 종찬이 있고, 점차 이를 극복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인다. 원작에서는 구원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고 인간에겐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영화에서는 구원이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구원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책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며, 계기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는 위로일 뿐이라 전하고 있다. 용서를 해주는 건 하나님이 해주는 게 옳은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