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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아이콘, 나는야 K장녀

우리에게도 빛나는 순간이 필요하다.

by J mellow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있다.
"넌 너밖에 모르니? 다른 사람도 좀 생각해야지!"

가족들이나 주변 어른들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건… 내가 이기적이라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게 아닌가 싶다.


복직을 앞두고 찾아온 정체불명 우울감


휴직이 끝나갈 무렵, 이유 없이 축 처진 내 모습을 발견했다.
"아, 회사 가기 싫어서 그러나?"
당연하다. 아이들이 학교 가기 싫어하는 것처럼, 직장은 원래 가기 싫은 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출근하기 싫다’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마침 그때, 국내 대기업 N사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클릭, 그리고 열심히 지원 요건을 살펴보다가 계정까지 만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엥? 나 이번 주에 복직인데, 여기 지원한다고?"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병원은 비영리기관이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급이 크게 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병원에서는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직종이 핵심이라,
행정직이나 기타 직군은 찬밥 신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돈보다 보람을 택했다.
처음에는 삭막한 자본주의에 질려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병원을 선택했다.
비록 직접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건강을 지키는 데 간접적으로라도 기여하고 싶었다.

그렇게 15년을 보냈다.
하지만… 잘 나가는 친구들은 이미 임원을 달았는데,
나는 여전히 쥐꼬리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나는 받침대인가, 기둥인가?
내 월급이 적다 보니 우리 집 생활비는 남편이 주로 부담한다.
자연스럽게 집안일은 내 몫,
아이들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뛰쳐나가는 것도 내 몫.
심지어 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맞춰 휴직까지 하면서,
이제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 모두 나에게 떠넘겨진다.

나는 가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생활하기 위한 전방위 서포터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없으면? 회사도, 가족도 불편하겠지.
하지만 받침대 하나가 없다고 건물이 무너지진 않아.
그냥 다른 받침대로 대체하면 되니까."

이거였다.
내가 우울했던 이유가.
나는 한때 튼튼한 기둥이 되고 싶었는데,
가족과 사회에서 남을 떠받치는 받침대가 되어 너덜너덜해진 내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우린 희생의 아이콘, K장녀야ㅋㅋ"


우울한 와중에도 아이들 방과 후 수업 스케줄을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둘째에게 가야금을 시킬까, 대금을 시킬까 고민하다가,
취미로 가야금을 하는 친한 대학 동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영아, 우리 둘째 가야금 시킬까, 대금 시킬까?
나 3월에 복직하는데, 쥐꼬리 월급 받으러 돌아간다고 생각하네 너무 동기 저하된다.
이직이라도 알아볼까?"

그랬더니 친구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음... 아무리 가족이라도 니 주변 사람들 위해 너무 희생하지 마.
직장 만족도가 너무 떨어지면 이직도 괜찮을 것 같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희생의 아이콘 K장녀야ㅋㅋ"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고작 한 줄짜리 메시지였지만, 친구는 내 머릿속을 꿰뚫고 있었다.
아들이 둘이나 있는 이 친구는 친정엄마가 암 투병 중이셔서
아이, 남편, 그리고 친정엄마까지 챙기느라 늘 짐을 한가득 짊어지고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내가 힘들어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K장녀들의 고달픈 현실


우리나라에는 나처럼 K장녀로 살아가는 동년배 여성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사랑하는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가시밭길을 자처한 우리들.

직장에서는?
잦은 가정사로 인해 조직 충성도가 낮아 보인다며 치이고.

집에서는?
아이와 남편 케어하느라 나를 돌볼 시간도 없이 바쁘고.

경제적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택했더니 돈도, 인정도 받기 어렵고.

그리고 내 삶은?
결국 갉아먹히듯 살아가지만, 그 누구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삶.

이게 바로 K장녀의 현실이다.

이제는 정말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아보고 싶다.
기둥이 아니라 받침대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조금 더 덜 희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K장녀들에게도, 빛나는 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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