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느낌은, 몸이 아니라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감각이다. 마음의 고통도 몸이 아니라 의식이 느끼는 감각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의식이 어떤 상태에 놓일 때 마음은 고통을 느낄까.
우울증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부터 온다. 그러니 원인을 알지 못하고서는 근본적인 치유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답을 찾으러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이미 붇다께서 잘 정리해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마음의 고통은 '무지無知'에서 온다.
물론 이 때의 무지知가 지식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어서 해탈할 수 있다면, 이미 모두가 해탈을 이루었을 것이다. 붇다께서 말씀하신 무지는 '연기緣起'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
“비구들이여, 무지가 무엇인가?
고통이 일어나는 연기(緣起)를 모르는 것이 곧 무지다."
연기(緣起)는 현대적으로 풀면 '촉발 원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말씀은 '고통이 일어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는 말씀이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무지는 다시 네 가지로 나뉜다.
1. 고통에 대한 무지(고苦)
2. 고통이 쌓이고 있음을 모르는 무지(집集)
3. 고통이 없는 상태에 대한 무지(멸滅)
4. 고통을 없애는 원리를 모르는 무지(도道)
말로 풀면 어렵지만, 실제 현상을 관찰해 보면 어렵지 않다. 담배를 예로 들어 보자.
중고등학생 시절, 어떤 아이가 치기 어린 마음에 담배를 배운다. 해롭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담배로 인한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다(苦).
담배를 배웠더라도 처음에는 쉽게 끊을 수 있다. 그런데 해악을 모르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서도 피우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피우고, 그렇게 점점 중독의 늪에 빠진다. 그리고 습관이 될수록 고통에서 벗어나기는 더 어려워진다. 고통이 쌓이고 있음을 모르는 무지다(集).
그런데 깊이 중독되면, 나중에는 아예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상태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도 못 하게 된다. 이것이 고통이 없는 상태를 기억하지 못하는 무지다(滅).
마침내 나이가 들어 담배의 해악을 알고 끊으려 하지만, 이번에는 담배를 끊는 법을 몰라 고통받는다. 고통을 없애는 원리를 모르는 무지다(道).
그리고 비극적일 경우, 이 무지 때문에 누군가는 폐암으로 죽음에 이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지'는 이렇듯, 고통의 정확한 원인과 그 인과의 연쇄 사슬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예시는 부처님 말씀을 너무 가볍게 다룬 느낌이 든다. 이번에는 실제의 삶에 적용해 조금 더 진지한 예시를 들어 보자.
어떤 부부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학생 시절 만나서 열렬히 사랑한 끝에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했다. 그런데 여자는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끊임없이 타인의 지지와 응원을 받아야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남자는 섬세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쉬이 피로를 느꼈다. 회사에만 다녀와도 눕고 싶을 만큼 정신적 소모가 심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집에 오면 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종일 남편을 기다린 여자는 남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핍의 크기 만큼 불안의 크기도 컸고, 그래서 남자의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남자에게 여자의 불평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결국 남자는 여자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고, 그럴수록 여자는 더 격렬하게 투쟁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가 심하게 다투던 어느 아침, 남자는 여자를 피해 차를 몰고 집을 나갔다. 그런데 생각에 사로잡혀 앞차를 보지 못했고, 결국 교통사고를 일으켜 장애를 입고 말았다.
병원에서 여자는 '내 인생이 왜 자꾸 불행해지는지 모르겠어요.'라며 울먹였다. 하지만 그 곁에서 나는 차마 이 고통이 당신이 만들고 쌓아온 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결핍을 남편에게 채워 달라 떼 쓰는 대신 먼저 사랑을 주었더라면, 그 날 아침 끓어오르던 분노를 참을 수만 있었어도 겪지 않았을 고통이라 말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슬픔을 위로하며, 너무 늦기 전에, 더 큰 고통이 오기 전에 그녀가 이유를 깨닫게 되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은 감정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불과 같아서 감정에 휩싸인 채 살아가는 것은 '불난 집에 사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화택火宅)'이라 하셨다. 그래서 고통을 멈추고 싶다면 먼저 감정부터 조절하라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1. 감정이 고통의 원인인 것을 모른다(苦). 2. 자신이 발산한 감정이 자기에게 되돌아 올 현실로 쌓이고 있음을 모른다(集). 3. 감정을 조절하며 사는 법을 잊은 현대인은 감정적이지 않은 상태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滅). 4. 뒤늦게 문제를 자각하고 벗어나려 하지만 이제는 벗어날 방법을 모른다(道). 그야말로 고집멸도의 무지다.
그 결과, 마음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점점 고통스러워지고,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병든다. 사회도 함께 무지해서 점점 더 감정적이고 거친 환경을 만들어 간다. 개인이 가라앉혀 놓아도 사회가 다시 일으키고, 누군가 조절하려 해도 오히려 비인간적이라 조롱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업의 사슬이다. 업(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에너지와 정보가 나와 타인의 마음에 쌓여, 결국 그 과보果報가 나에게 되돌아오는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돈을 더 번다고,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낸다고, 좋은 남편을 만난다고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가 더 행복하게 살 거라 보장할 수 있을까? 공부만 하느라 쌓지 못한 정서적 힘이 자식에게 이혼의 고통을 안겨주고, 손주들을 결손 가정에서 자라게 할 수도 있음을 안다면, 그 인과의 사슬을 정말로 제대로 안다면, 친구도 사귀지 말고 공부만 하라는 이야기를 정말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에티카'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만일 행복이 눈 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이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 스피노자 『에티카』
감정의 불이 없는 상태로 사는 것, 연기가 걷힌 맑은 창공을 보며 사는 일은 드물고 어렵지만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다. 또, 고통의 원인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역으로 '나'를 변화시키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붇다의 말씀이 인간에게는 희망이자 구원이다.
※ 짧은 요약
고통은 고통의 원인을 모르는 무지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