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다른 곳에 올렸던 글인데, 여전히 유효한 면이 있는 것 같아서, 저도 읽어볼 겸 이곳에 다시 올립니다.)
지난 주말, 가족 모임에 갔다가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하도 인문학, 인문학 하니까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가 엄마에게 인문학이 뭐냐고 물었던 모양입니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대답을 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뭔지 알 것은 같은데 막상 말로 하려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조금씩 개념적 사고가 발달하는 나이인 5학년, 자연스럽게 생긴 호기심에 멋지게 답해 줄 수 있었다면 막 발달하기 시작한 사고력을 자극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그런 어려움을 겪는 부모님, 삼촌, 고모, 이모,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먼저 인문(人文)을 떠나 ‘학(學)’이라는 게 뭔지 생각해 보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학문이 되려면 먼저 규칙이 존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이 성립하려면 먼저 자연 현상에 규칙이 존재해야 합니다. 만약, 날씨가 계절 같은 규칙이 없이 제 멋대로 매일매일 달라지는 것이면 기후는 연구할 필요도,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자연 속에는 규칙이 존재합니다. 그것도 수학적 계산만으로 가보지 않은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을 만큼 엄밀한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문학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삶 혹은 정신’에도 어떤 원리와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 삶의 원리를 밝히는 학문
만약 인간의 삶이나 정신이라는 것이 아무 원리 없이, 사람따라 기분따라 달라지는 변덕스러운 것이라면 굳이 힘들여 인문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100년 전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 그것은 그 시대의 이야기고 21세기의 우리는 또 다르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수천 년 동안 인문학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온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무늬(人文의 文은 무늬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속에서 어떤 원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몇백 년 전 씌어진 고전을 읽으며 감동을 느낍니다. 지금의 삶은 그 시대와 다르고 지금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안에서 시대를 초월해 면면이 흐르는 어떤 삶의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보편성, 다시 말해 규칙을 찾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문학이 왜 필요한지도 이해가 됩니다. 예컨대 계절 변화의 규칙을 몰라서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는 농부가 있다고 해 보지요. 그의 삶은 시간이 갈수록 힘겨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활용하지 못하고, 모든 시행착오를 일일이 몸소 겪으며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물론이고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도 사실 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먼저 경험한 시행착오를 활용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멋진 삶의 여행을 위해
우리는 모두,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모른 채 매일의 삶을 살아갑니다. 아무런 사전 교육 없이 지구라는 별에 여행을 온 것과 같습니다. 낯선 곳에 여행을 가면, 우리는 먼저 그 지역을 앞서 경험한 경험자나 그 지역을 잘 아는 가이드를 찾아 나섭니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곳에서는 어떤 규칙이 필요한지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삶의 원리는 삶을 한 번 살아 봐야 제대로 알게되는 것이라서 우리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또, 원리는 있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현상이 매우 다양해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만으로는 긴 시간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법칙을 찾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앞서 삶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의 경험은 '문학'에서 찾을 수 있고, 과거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시행착오는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철학은 이 모두를 관통하는 본질적인 규칙을 찾는 데 헌신하지요. 문학과 역사, 철학이 인문학의 3대 분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최근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게 하는 역할을 영화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인문학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삶의 원리를 제대로 알려주어야 그 원리를 활용해 남은 생을 의미있고 보람있게 살 수 있을 것이니까요. 제대로 된 가이드도 없이 모든 과정을 일일이 스스로 겪으며 살아내려면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요? 10년 후면 소용이 없어질 지식을 외우느라 그 소중한 경험의 시간을 다 책상 앞에 앉아 보냅니다. 그리고 막상 사회에 나갔을 때는 무릎이 깨지고, 길을 잃으며 상처 받은 후에야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제서야, 세상에 기여하고 삶을 꽃피우는 데 써야 할 시간과 에너지를, 삶의 의미를 찾느라 방황하는 데 쓰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듯이 말입니다.
삶의 경험, 나 하나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지구를 함께 여행하고 있는 70억 명의 보편적인 경험, 그리고 나아가 수천 년간 지구를 다녀간 수많은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전해주는 것, 바로 그것이 인문학 교육입니다. 그 지혜를 바탕으로 시행착오와 위험은 덜 겪으면서, 그 힘을 아껴 다음 여행자를 위한 더 멋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놓고 가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