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이야기 -1
T와의 만남은 나의 절친인 H와 코엑스몰로 놀러갔을 때였다.
H와 나는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볼 예정이었고, 그 때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뽀모도로라는 파스타집에서 마치 의식처럼 파스타와 피자를 나눠먹고
천천히 메가박스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H~!"
등 뒤에서 내 친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돌아보니 왠 훤칠한 남자가 서있었다.
180이 좀 넘는 큰 키. 옷을 입어 잘을 모르겠지만 군살은 없어보이는 체형
댄디한 느낌의 호감형인남자였다.
"어 T 안녕? 여긴 무슨일 영화보러왔어?"
H가 반갑게 그에게 인사를 했고, 뒤이어 나에게도 소개해줬다
"여기는 T. 우리보다 한 살 많고, 여기는 내 친구야."
"안녕하세요."
"아 네 반갑습니다."
5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어색하기 그지없는 시간
나는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고, 다행히 H는 그런 내 성격을 알기에
"우리 영화시간 다 되서 오늘은 먼저 가볼게. 이런데서 만나다니 진짜 우연이다! 연락해~."
라며 그 자리를 정리해주었다.
"누구야?"
"어 예전에 모임에서 알게된 오빠."
나에게 T는 깔끔한 인상의 내 친구의 아는 사람 으로 다가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어릴 때 부터 단짝이었던 H와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요즘들어 부쩍이나 연애에 관심이 많아진 H는 여러 활동들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고
모임에서 만난 남자의 이야기 데이트 한 이야기로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카톡
H의 폰으로 카톡이 울렸고 내용을 좀 훑어보던 H는 정말 카페가 떠나가라 웃었다.
평소에도 H는 웃음이 아주 크고 호쾌한 친구인데 정말 그녀의 거의 최대치로 호쾌하게 웃자 일순 카페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한참을 웃던 H는 눈물까지 닦아가며
"야. 너 남자 안만날래?" 라고 물었다.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저번에 만났던 T 있자나. 왜 우리 메가박스에서."
"응? 누구였지?"
알고있지만 나는 관심조차 없어서 잘 모르겠다는듯한 모른척을 괜히 했다.
"미친여자야 다 티나거든? 야 암튼 걔가 너 맘에 든다고 소개해달래."
여우같은 기집애..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던 H는 나의 비밀 또한 알고있었고, 한참 목소리를 낮춰
"이 오빠 바이섹슈얼이라 아마 상관없을거야. 그리고 소문이 좀 안좋아. 그냥 데이트메이트정도로만 생각해 마음 많이 주지 말고." 라고 신중하게 조언을 해주었다.
내 인생의 첫 소개팅
장소는 청담동의 한 루프탑 이태리음식점이었다.
단 둘이 만나기에는 너무 뻘쭘했기에 H까지 해서 셋이 만나게 되었다.
출발할 때 부터 H는 이미 본인이 주선해주는거니 맛있는걸 얻어먹겠다고 한껏 부풀어있었다.
강남역까지 T는 우리를 마중나와주었고, 강남역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장소까지 이동했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주변으로는 어두움이 조금씩 내려앉고 루프탑에는 조명이 밝혀졌다.
T는 본인을 검은머리 외국인으로 소개했고,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 소지자이며
한국에서는 초,중학교까지만 다니고 나머지 생활을 미국에서 했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 미국의 친구 집에 1개월정도 놀러간 경험이 있음을 얘기하고
한국은 어떻네 미국은 어떻네 이내 여러가지 이야기를 편히 하게 되었다.
주변 분위기가 좋아서였을까? 눈 앞의 사람과의 대화가 재미있어서였을까
눈 앞에 있는 남자가 괜찮아보인다.
H는 "나 이거도 먹어볼래. 저거도 먹어볼래." 라며 그 가게의 모든 음식을 주문할 기세였다.
T는 그저 웃으며 "그래 다 시켜 말하지 말고 그냥 시켜." 라고 하고 나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미국에 뉴욕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고 했고, 뉴욕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시아권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뉴욕이란 그냥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에 나오는 막연한 어떤 곳이라
그의 이야기를 더욱 재밌게 들었던 것 같다.
한참을 얘기하고 그는 나에게 그냥 웃으며 핸드폰을 건넸다.
나도 말없이 내 번호를 그에게 찍어주었다.
T와의 첫 데이트는 다시 코엑스 메가박스였다.
무슨 영화인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우리는 영화 시간 2시간정도 전에 미리 만나서 T가 사주는 저녁을 먹으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초반 낯가림이 있는 나는 그날 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주었다.
"나도 어릴 때 해외생활 했고, 얼마 전까지 해외에서 유학하다가 적성에 안맞아서 들어왔어요."
"전공이 뭔데요?"
"뭐일거같아요? 맞추면 소원 하나 들어드릴게요."
그래도 세 번째 만남이라고 나는 T가 많이 편해졌고, 이런 농담까지도 던지게 되었다.
"뭔가 이과 계통은 아닐거같은데.. 음.. 뭘까? 문학?"
"틀렸으니까 소원은 건너간거에요? 저 경영학 했어요. 근데 하고싶어서 한 게 아니고 소거법으로 정했어요."
나는 유학생활 적응을 못하고 돌아왔으며, 지금은 하고싶은 다른 공부를 하고있다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T의 아버지는 외국계 회사의 이사급 임원으로 재직중이고, 위로 형이 한 사람 있다고 했다.
미국국적임은 이미 알고 있었고, 재미있게도 나와 같은 전공인 경영학을 배우는 중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캐쥬얼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그래도 연애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게는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가는 이 순간조차 너무 즐겁기만 하다.
대화의 내용만 들었을 때는 재밌을 요소가 하나도 없는데도 뭔가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렇게 한참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마치고 코엑스몰 내부를 가볍게 돌다가 영화를 보러 갔다.
"팝콘은 제가 살게요. 밥도 영화도 다 쏘셨으니."
판매대 앞에서 한사코 카드를 내미는 나와 그걸 가로막는 T.
앞에서 그걸 보고 있던 알바의 표정이 어땠는지까지는 모르겠다.
단지 T는 첫 데이트이니 모든 비용은 다 자신이 부담하게 해달라고 했고, 나는 그렇게 대접을 받고야 말았다.
그렇게 컴컴한 영화관으로 들어갔고 광고가 시작됐다.
당시 H는 피겨 코치였는데 얼굴도 반반하고 말재간도 있어 나름 잘 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퀸여나와 함께 CF도 몇 편인가 찍었는데 영화관 광고에서 하필 그녀의 얼굴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공통의 지인의 얼굴이 스크린에 비추는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곧이어 T도 옆에서 쿡쿡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몇 편의 광고가 더 지나가고 영화관 안은 완전히 암전되었다.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아무리 기억을 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날 영화관의 느낌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축축한 두근거림'이다.
영화를 보다가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 옆을 보니 T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연애가 처음이었기에 이 사람이 어디 불편한가 싶어서 중간부터는 T의 상태에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화장실이 급한 것도 아니었고, 뭔가 속이 안좋은 것도 아니었다.
한참을 안절부절하던 T가 결심한 듯 갑자기 나의 손을 움켜쥐었고, 움켜쥔 그의 손은 긴장때문인지 땀으로 흥건했다.
두근
갑자기 심장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다.
그의 손이 이미 젖어있었기에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나의 손에서도 땀이 배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화 중반부터 영화가 끝날때까지 우리는 두근거리면서 서로의 축축한 손을 잡고 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