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이야기 -2
축축하면서도 두근거리는 이상한 영화관 데이트가 끝났다.
그 날부터 T의 호칭은 더이상 오빠가 아닌 자기가 되었고, 나는 그렇게 내 풋풋한 첫 연애를 시작했다.
그와의 데이트는 주로 맛집을 찾아가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그가 친구들과의 약속자리로 가면서 끝난다.
미국에서 잠깐 들어왔던 그는 만날 친구들이 참으로 많았고, 거의 매일이 친구들과의 술 약속이었다.
종로로 이태원으로 강남으로
낮에는 아버지 친구의 회사에서 인턴생활을 했고, 저녁에는 나와 식사, 밤에는 술약속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강철같은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소위 말하는 있는 집 자제였던 그는 소비에 있어서 매우 관대했고 그와의 데이트는 언제나 풍요로웠다.
내가 먹어보고 싶은 것이나 본인이 먹어보고 싶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낮 내내 나누다가 저녁에 만나면
얘기했던 그 음식을 먹으러 가는 거였다.
인정사정없이 매운 불닭도 먹으며 연신 땀을 식히기도 했고, 어디 나라 음식인지도 모르겠는 희안한 음식도 먹어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면 분위기 좋은 카페로 이동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그는 나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낸 뒤 항상 술약속으로 가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H와 통화를 하곤 했고 H는 그런 나를 언제나 답답해했다
"미친년아 절대 마음 주지 마. 너 상처받아."
"T 그렇게 좋은 남자 아니야. 아 괜히 너 소개했다."
그녀와 통화를 하면 언제나 그녀는 나를 안타까워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 번은 그의 집 근처인 압구정에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리니지 게임을 하고있었는데, 집 근처에서 아이템을 구입하기로 했다고 했다.
연인의 동네에서의 첫 데이트라니.
모든게 처음이었던 나는 마치 처음으로 소풍을 가는 유치원생처럼 들떠서 준비를 하고 약속시간에 압구정역으로 나갔다.
보통 우리는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이용하는 데이트를 많이 했는데 그날의 그는 차를 몰고 나왔다.
아우디 A8
운전 실력도 좋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미국에서만 운전을 해보았고, 한국의 운전은 처음이었다.
넓은 도로만 달리던 그에게 한국 강남 압구정의 골목길은 너무나도 좁았고, 그가 끌고 나온 차는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컷다.
쿵. 우지직
"아! X발!"
아이템을 거래하기로 한 PC방 앞에 주차를 하던 그는 결국 뒤에 얌전히 주차되어있던 차를 제대로 들이받았다. 앞,뒤가 아닌 가로로 받아버리는 사고차는 앞,뒷문을 교체해야했다.
그렇게 그는 아이템값 말고도 차 수리비까지 지출하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이템을 사고, 식사를 한 뒤 우리 동네까지 나를 데려다 줄 계획이었지만, 사고가 발생하면서 우리의 계획도 바뀌었다.
"나 오늘은 도저히 더 운전을 못하겠는데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밥을 먹으면서 T가 나에게 물었다.
자고가다니....
그럼 나도 드디어 그 거사를 치루게 되는건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당시 순결을 지키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하나 라는 걱정과 해보고싶다 라는 호기심이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지만 결국에 본능은 이성을 이기기 마련이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부딪히면 어떻게던 알게 되겠지
"어.. 나 그럼 H랑 같이 논다고 집에다가 얘기만 좀 할게."
난생 처음으로 와보는 연인의 집
압구정에 있는 유명한 아파트인 그의 집은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리모델링을 마쳐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했다. 하얀 마룻바닥이 펼쳐져있는 넓은 거실 가운데에는 그랜드피아노가 놓여있었다.
현관을 지나 복도를 통과해 거실을 지나서 한참을 더 들어가면 있는 그의 방.
우리는 혹시라도 누군가 깨어날까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T의 방으로 향했다.
"나 친구 와있으니까 깨우지 마시라고 아빠한테 쪽지 하나만 남기고 올게. 물 가져다줄까?"
T는 마치 초등학생같은 글씨로 삐뚤빼뚤 뭔가를 적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끄덕'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움직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심장이 터져나올거만같았다. 말을 하면 떨리는 목소리때문에 들켜버릴거만 같았다.
그는 싱긋 웃고서는 방 밖으로 갔고, 이내 물 한 잔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피곤하다~!" 고 조용히 외치며 T는 바로 침대로 쓰러졌다.
침대에 누워서는 싱긋 웃으면서 한쪽 팔을 본인의 머리에 기댄 채 옆으로 누워서는 자기 옆의 빈 자리를 툭툭 친다.
"근데 나 좀 편한 옷 없어?"
그는 그제서야 "아 맞다. 자려면 옷이 편해야지." 라며 본인의 파자마를 꺼내주었다.
옷을 갈아입은 김에 화장실에 가서 세안과 양치도 하고 왔다.
T는 침대에서 꾸벅꾸벅 졸고있었고, 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가서 누웠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소리가 내 귀에 점점 더 커져갔고, 그가 조용히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리고 덮쳐오는 입술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새 립밤이라도 발랐는지 립밤 특유의 달달한 향도 났다.
그렇게 한참을 뜨겁게 키스를 하다가 T는 가볍게 내 이마를 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팔베개 해줄테니까 푹 자." 라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첫 연인과의 첫 잠자리는 달콤하고도 싱겁게 끝이 났다.
T는 많이 피곤했는지 이내 코를 골며 골아떨어졌고, 잠자리에 예민한 나는 그렇게 뜬 눈으로 그의 옆에 누워있다.
말똥말똥하게 눈을 뜨고 2시간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T가 품에서 나를 놓고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코를 골기 시작했고, 나는 잠도 안오는 김에 그의 방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의 방을 구경하던 나는 이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방에 전시되어있는 상장들 T. 19xx년 x월 x일 생.
그 상장 속의 T의 이름은 내가 알고있는 이름인데 생년월일이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T는 나보다 1살 연상. 상장 속의 T는 나보다 2살 연하였다.
그렇게 다시 T 옆에 누웠고, 나는 그의 생년월일로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다.
"잘 잤어?" T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느새인가 그의 옆에서 정신없이 잠이 들었나보다.
"집 앞에 브런치 맛있는데 있으니까 거기 갔다오자."
눈을 뜨자 11시를 조금 더 넘긴 시간이었다.
그는 내가 준비하는 동안 본인도 이 옷 저 옷을 대가며 입고있었다.
그의 픽은 셔츠. 댄디한 스타일의 T와 매우 잘 어울리는 옷이다.
"잠깐만 오빠. 나 꼭 해보고싶던게 있어."
나는 그의 앞에 서서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 하나 잠궈본다.
"나 이거 로망이었거든. 덕분에 소원 1개 성취!"
T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내려보다가 "귀엽네?" 라며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렇게 둘이 압구정 거리를 가로질러 브런치집에 가서 에그베네딕트와 토스트를 먹었다.
또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다 "근데 어제는 왜 거기서 멈췄어?" 라고 묻자
"거기서 더 가면 내가 자제를 못할거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치이.. 난 오빠를 첫 남자로 받아들일 각오 하고있었는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밤새 궁금했던 그걸 물었다.
"사실은 어제 오빠가 자는 동안 오빠 방을 좀 봤거든. 근데 상장에 나오는 생일이 내가 아는거랑 다르더라?"
순간 T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흔들린다. 그러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어 사실 나 나이 속였어..." 라고 대답한다.
"왜?"
"그냥 좀 어릴 때 부터 형들이랑 놀다보니까, 우리 형 나이를 쓰게되더라."
워낙 사람들 만나서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랬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이 사람이 나보다 한 살이 많던 두 살이 적던 내 첫 남자친구임에는 변함이 없는걸
그렇게 조금은 불편하게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거실의 그랜드 피아노 앞에 나를 앉혔다.
"있어봐. 나도 애인 생기면 해보고싶었던게 있어."
라면서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들려주었다.
나도 답가로 조지윈스턴의 케논변주곡을 들려주었고, 둘이서 젓가락행진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서로 좋아하는 음악들을 들려면서 아까의 불편한 분위기는 누그러들었다.
오후 4시쯤 되었을까?
"나 저녁에는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서 이제 너 데려다 줘야겠다."
라며 그는 차에 나를 태워 집 근처까지 배웅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