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죽는다면 담배를 피우고 싶어.

8월의 크리스마스 : 내일 죽지 않을 거라는 확률에 베팅하며 사는 법

by 송쏭쏭


추위에 벌벌 떨다가 한 시간쯤 기절하듯 잠을 자고, 고대하던 운동도 다녀왔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까. 최근 이토록 우울했던 적이 없었는데…. 혹시나 해 생리 주기도 확인했지만, 아직 멀었다.


이유 없는 우울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사이좋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내가 골라든 영화는 평소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틀었다.


주인공이 시한부라는 걸 알게 된 건 영화 중반이었다. 죽음을 앞둔 정원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라도 술을 마실 것 같아. 그리고 잠든 아버지의 담배를 몰래 가져와 피우던 그를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도 죽는다면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돌이켜보면 흡연의 욕구가 치밀었던 건 딱 두 번이었다. 한 번은 대입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고등학생 때. 담배를 피우면 이 답답함이 사라질까 싶었지만, 담배를 구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모범생답지 않은 노력'이 더 큰 스트레스일 것 같아 포기했다.


두 번째는 회사에 입사하고 난 뒤였다. 회사는 정말 미친 듯이 바빴는데, 눈치가 보여 화장실 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바쁜데 남자 직원들은 담배를 피우러 자주 자리를 비웠다. 바쁠 때 화장실 가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있어도 담배를 피우러 가는 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담배를 피우면 저렇게 눈치 보지 않고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때 마침 담배 가격이 올랐다. 소박한 내 월급으론 담배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현실의 벽은 늘 그렇게 욕망보다 비쌌다. 그 뒤로는 크게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왜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담배를 피우고 싶어 졌을까?


평소라면, 나는 커리어와 돈, 미래에 대해 온갖 고민을 한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할까, 더 큰 성공을 쟁취할 수 있을까,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지만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런 거대한 고민은 모두 사라졌다. 그 대신 떠오른 것이 고작 담배를 피우는 거라니.


죽는다는 건 미래가 없다는 뜻. 사람의 인생을 사로잡는 가장 거대한 불확실성 하나가 사라진다는 뜻. 나는 언제나 미래가 두려워서 많은 것을 미래로 미루고 살았다. 고민도, 계획도, 모두 ‘내일 죽지 않고 오래 살 것이다’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참고 숨어버린다. 하지만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 모든 게임은 끝났다. 대신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욕구에 사로잡힌다. 내게는 그게 담배였다.

내 인생은 언제나 방향성이 없었고, 그래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평생을 열심히 사는 거겠지! 따위의 자기 위로를 하며 살아왔다. 그 결과, 목적지가 없는 배 위에선 아무리 열심히 배를 저어도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제 이 배가 어디로 가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그저 배 위에 누워 하늘이나 보고 담배나 피우고 싶다. 배 위에서 뺨을 간질이는 바람, 몸을 흔드는 파도의 출렁임 같은, 연약하고 단순한 감각에 몰입하고 싶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내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분명히 끝은 나겠지만 아직은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다림처럼 유리창에 돌을 던지진 못하겠지만, 그 마음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유리창에 돌을 던지기엔, 경찰서를 들락거릴 날이 두려우니까.


아, 그 차이, 그 차이가 어린 시절 내가 정체도 모르지만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싱그러움의 진짜 정체일지도 모르겠다.


“너는 20대 때는 엄청 찌질했을 것 같아.”


문득 지난해, 친한 지인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20대는 비 오는 망망대해 위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어디엔가 있을 영광의 유토피아를 찾아 미친 듯이 노를 젓는 시기였다. 그가 다시 말했다.


“너는 나이 들어서 더 좋아졌을 타입이야. 지금이 제일 예쁠 것 같아.”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유토피아에 닿지 않아도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안다. 노를 젓다 지치면 누워서 이마를 닦기도 한다. 그러다 내 두 뺨에 20대 때보다 더 통통하게 살이 올랐음을 느낀다.


아마 영화 마지막에서 다림이 사진관 밖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보고 웃었던 것은 그 얼굴이 예뻐서 이기만은 아니었으리라. 하지 분명 그 마음도 없진 않았을 거로 생각한다. 진짜 이쁘긴 하더라. 그건 아마도 자신이 타올랐던 그 순간이, 돌아봤을 때 나쁘지 않았다는 그런 마음이리라.


그러니까 언젠가 내가 내 사진을 보고 웃는 날이 온다면 , 그건 돌아봤을 때 내가 봐도 꽤 괜찮은 나였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내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여전히 용납하지 못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문득, 영정사진을 찍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안경을 벗고, 예쁘게 사진을 찍어 달라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삶을 기록을 자신이 완성하겠다는 태도. 나도 그 나이가 되면 그럴 수 있을까?


할머니의 영정사진 위로 얼마 전 친구가 찍어준 내 사진이 겹쳐졌다. 분명 친구는 이 조명 아래에 네가 너무 예뻐 보인다며 셔터를 눌러주었건만, 내가 본 사진 속의 내 얼굴은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은 파도의 흔적이 가득한 얼굴을 인정하기는 여전히 힘들지만, 아직은 죽지 않아서 내 삶의 기록은 계속될 것이다. 이 촛농처럼 흘러내린 얼굴로 내일을 살아야 한다. 죽음보다 더 확실한 건, 아직은 끝나지 않은 이 일상이니까. 정원의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사진관 문을 열고 스쿠터를 타고 일을 하러 나가듯이, 나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번 주말은 좀 푹 쉬며 힘을 모아서, 월요일은 다시 노를 저어야겠다. 유토피아에 닿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멋진 윤슬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