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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틈새 04화

가까움이 칼날이 될 때

by 담은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어떤 일은 금세 잊히지만, 마음 깊숙이 남아 오래도록 나를 흔드는 순간도 있다.

억울함은 곧잘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속을 저미며 남아 있다.


내가 있는 사무실은 공사현장 사무실이다.

여기서는 각 감리원들의 경비를 취합하여 본사로 결제를 올린다.

본사에서는 내가 올린 지출결의서와 영수증을 하나하나 대조해 금액은 맞는지, 계정과목이 정확한지 확인 후에 경비를 입금해 준다. 여기서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회계상 오차가 있으면 맞을 때까지 끝없이 수정해서 올려야 하기 때문에 전도자금 정리를 할 때는 신경을 곤두세워서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그날도 전도자금 처리로 몰두하고 있었다.

십 원짜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손과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사무실 안은 각자 맡은 업무로 숨소리조차 무겁게 들릴 만큼 정적이 흘렀다.

그때, K상무님이 내 앞에 주유영수증을 내밀었다.

받아 살펴보니 휴일에 주유한 영수증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지진이 나기 시작했다. 눈썹이 꿈틀거리고 입이 바짝 말랐다.

그렇지만 업무는 업무이니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웃으며 말했다.

"상무님, 이건 휴일에 주유하신 거라 전도금 처리가 어렵습니다~"


우리 회사차량은 장기렌트 계약을 맺어 이용하고 있다.

계약상 근무용이므로 휴일에는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규정상 휴일에는 차량도 운행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휴일에도 차량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 나는 꼭 당부드린다.

회사차 운행은 부득이하게 하시더라도 주유는 평일에 하시라고.

휴일에 운행하지 않는데 주유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명백히 규정위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상무님은 떡하니 휴일에 주유한 영수증을 가지고 오신 거다.

내 당부를 코로 들으신 걸까? 내 목소리가 공기에 흩어져버린 듯 허무했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지켜 다시 말씀드렸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내 머릿속엔 없는데?"


순간 숨이 막혔다.

분명 다섯 명이 함께 들었던 자리였다.

그런데도 혼자만 기억이 없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억울함이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꾹 누르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처음에 회사 규정상 회사차량은 휴일 운행 금지, 휴일 주유도 안된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요?

........ 그러면 휴일근무서를 작성해 주세요."

나는 주유비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럼 그거 찢어버려!"

그런데도 상무님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옆에서 업무 하시던 상무님들도 깜짝 놀라서 나와 K상무님을 번갈아 바라보셨다.


순간 영수증이 아니라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했었고, 이 날도 업무상 차분히 얘기했다.

휴일근무서를 쓰면 업무 한 게 되어서 주유비를 받을 수 있으니 그렇게라도 받게 해 드리려고 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돌아온 건 억지와 역정이라니.

게다가 우리 사무실은 6명의 작은 사무실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기 때문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회사 오너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도, 마치 내가 고의로 안 해주는 것처럼 화살이 나에게 꽂혔다.

순간 울컥하는 눈물이 차올라왔지만,

다시 꾹 삼켰다.

그동안의 좋은 감정이 깨지고 칼날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그 후 무거운 무엇인가가 마음을 짓눌렀다.

억울함과 답답함이 돌처럼 굳어져 마음을 짓눌렀다.

수도 없이 내가 기분 나쁘게 얘기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퇴근길 발걸음은 한없이 느려졌다.

가로등 불빛조차 내 마음을 밝히지 못하는 밤이었다.


며칠 뒤, 회식자리에서 누군가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보탰다.

"솔직히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말하는 순간 목이 마르고 손끝이 떨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옆에 있던 다른 상무님이 무심히 말씀하셨다.

"처음이라 몰라서 그랬겠지."

그 말은 이해하라는 위로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처 입은 내게는 차갑게 파고드는 바늘 같았다.

괜찮다는 듯 흘려진 내 이야기가 한순간에 하찮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대했던 공감 대신 가벼운 농담이 돌아오자 억지로 웃어넘겼지만, 마음에는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억울한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줄 알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차가운 돌덩이가 남아 나를 짓눌렀다. 그러나 가만히 곱씹다 보니 조금씩 알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말이 오래 남는다는 것, 그래서 더 쉽게 상처가 된다는 것.

낯선 이의 무심한 말은 바람처럼 스쳐가지만, 가까운 이의 말은 깊숙이 스며들어 뿌리처럼 박힌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침묵은 상처를 지워주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그 무게를 더 단단히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는 순간, 그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억눌러 참는 것보다, "나는 힘들었어"라는 짧은 고백이 나를 더 지켜준다는 것을.


짧은 한마디가 관계를 끊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다리가 되었다.

"그때 나는 이런 마음이었어."라는 고백은 화살이 아니라 울타리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울타리가 필요하다.

그 울타리 안에서야 서로가 안전할 수 있다.

그리고 시작은 언제나 솔직한 한마디였다.


누군가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마음에 묻어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억울하고 답답했던 순간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넘겼지만, 여전히 마음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작은 용기를 내어도 좋다.

"그 말이 내겐 상처였어요"

"나는 이렇게 느꼈어요."

짧은 고백은 관계를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더 단단한 다리를 놓아준다.


나는 이제 안다.

가까움이 칼날이 되지 않게, 솔직함이라는 울타리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다짐한다.

나는 내 마음을 숨기지 않겠다.

세상이 늘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다시 걸어갈 힘이 생긴다.

작은 솔직함은 언젠가 따뜻한 위로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안고, 내일을 향해 조금 더 가볍게 걸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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