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틈새 10화

암이 데려간 너

by 담은

그날도 은행나무가 노란색으로 갈아입던 계절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너를 만나러 가는 길 위로 들뜬 마음을 얹었다.

오랜만에 본다는 사실에 그리움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너를 본 순간, 나는 숨이 멎어버렸다.

창백한 얼굴과 다 빠져버린 머리카락 그리고 애써 웃는 엷은 미소.

너는 그렇게 삶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우리는 중학교 입학식에서 처음 만났다.

그 후로 고등학교까지 여러 계절을 함께했지.

그 계절 속에서 내게 처음으로 따뜻했던 친구이자 다른 의미의 엄마였다.

나에게 삶의 즐거움과 삶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너는 나에게 삶이 준 선물이었다.


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프다고 했을 때,

그 말이 그토록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냥 항암 치료만 잘 받으면 낫겠지..."

네가 했던 말은 금방 낫는 병처럼 느껴졌고,

나도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암"

그 이름은 참 잔인하게도

우리 사이에 조용히 틈을 만들었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너를 삼켜갔고, 연락은 점점 뜸해졌다.

너의 웃음은 점점 그림자 아래로 숨어들었다.


나는 무력했다.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꾸역꾸역 갉아먹었다

어떤 날은 문자를 남기려다가 멈추었다.

나의 염려가 너에게 부담이 될까 봐.

나의 안부가 너에게 아픔이 될까 봐.


나는 무지하게도 항암치료만 받으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린 아들을 걱정하던 너는 끝내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었다

그날 나는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너의 얼굴을 보고도 차마 울음을 삼켰던 그날의 내가 그토록 미웠다.

네가 속상해할까 봐 눈물을 꾹꾹 참았다고 얘기할걸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안쓰러웠던 너를 따뜻하게 안아줄걸.

조금만 더 네 눈을 들여다볼걸.

한 번이라도 더 널 찾아갈걸.

그날이 마지막으로 너를 만남이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네가 사라지는 그 마지막 별이 된 날에

나는 수많은 후회의 말을 쏟아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그 번호 너머로,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카톡엔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났지만

끝내 답장은 오지 않았다.


네가 없다는 현실은

내가 가장 먼저 느끼는 '빈자리'가 되어버렸다.

마음 한쪽이 늘 저릿저릿해 왔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든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는 것일까.

그렇게 마음이 무뎌질 무렵, 또 다른 친구에게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친구를 잃어간다는 것.

사랑하던 사람의 생명이 꺼져간다는 것만큼 아픈 것이 있을까.

나는 애써 밝게 통화를 마치자마자 울음이 터져버렸다.

내가 나 먹고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친구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건 아닐까.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만날걸 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카톡을 보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시간 내서 보러 가마.' 하고.

차마 아프지 말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어릴 때 친구만큼 순수한 마음을 나눈 사람은 드물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언젠가 보자'는 말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봄날, 교정 가득 흐드러진 벚꽃 아래를 걸었던 때도

교정의 오디를 따먹다가 손이 까맣게 물들었던 때도,

창문을 넘어 땡땡이를 쳤을 때도,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다가 들켜 벌을 받을 때도,

늘 같이 했던 나의 친구들.

그런데 서로의 생활에 쫓겨 만나지 못하다가 겨우 죽음 앞에서야 만나러 가겠다니.

마음이 먹먹해져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가을빛으로 파랗게 물든 하늘을 바라본다.

네가 삶을 떨구었던 그날의 하는 같다는 생각에 다시 마음이 아려왔다.

내가 사는 이 시간의 끝에 너의 흔적이 아직 따뜻하게 남아있다

저 하늘 너머 어딘가 천사가 되었을 것 같은 네가 보고 싶어 져서, 노란 은행잎 아래에서 그리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9화다른 사람이 나한테 함부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 지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