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일로 분주한 사무실.
웅웅 거리는 온풍기가 따뜻한 바람을 토해내고, 회색 건물 사이로 햇빛이 느슨하게 발을 내딛는다.
키보드 소리만이 고요한 공기를 두드린다.
내가 앉은 책상 위에는 정리되지 않은 영수증과 명세서, 결재서류들이 어지러이 쌓여있다.
"나를 정리해 볼래?"라고 놀리는 것처럼.
매달 초면 반복되는 풍경이다.
지난달 전도자금을 정산하고 수발신 문서를 정리하는 일은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
"윤 과장님, 이거 왜 이래요?"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참 보고서를 작성하던 상무님이 손짓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뽀르르 가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한 번만 클릭하면 해결될 간단한 문제였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여기를 이렇게 하면 돼요."
"과장님은 모르는 게 없네요. 허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예전엔 몰랐어요. 자주 하니까 알게 된 거죠."
익숙하다는 건 꼭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좋아하지 않아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어느새 손에 익는다.
서툴던 손길이 점점 익숙해지고, 실수는 줄고 손끝은 빨라진다.
그렇게 쌓인 익숙함은 자신감이 되고, 자신감은 능숙함을 부른다.
일이 그렇듯, 사람도 그렇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할 때가 있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만으로도 감정이 오간다.
긴 시간 동안 쌓아온 익숙함이 그 편안함을 만들어 준다.
반면, 낯선 사람 앞에서는 말수가 줄고 말의 속도도 느려진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생각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괜히 오해받을까 망설여지고, 말 대신 침묵이 공간을 채운다.
낯선 사람과의 관계는 마치 새로운 업무 같다.
어색하고 서툴고, 조금만 실수해도 마음이 휘청인다.
그 거리감을 감당하기 버거울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것보다는 익숙한 것에, 낯선 사람보다는 익숙한 사람에게 기대게 된다.
하지만 어쩌면, 그 낯섦은 새로운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사무실에 상무님 한분이 새로 오셨다.
처음엔 그 상무님의 말투나 표정이 낯설었다.
말을 꺼낼 때마다 어딘가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매일 함께 점심을 먹고, 한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조금씩 익숙해졌다.
서툴게 시작된 관계는 서서히 속도를 달리했다.
처음엔 한마디 건네는 데도 오래 걸렸지만 이제는 눈짓 하나면 충분하다.
어색하던 웃음이 자연스러워지고, 주고받는 말들 속에 온기가 배어난다.
사람도 일처럼, 자주 마주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고, 조금 더 다가가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처음의 낯섦이 있었기에 지금의 익숙함이 소중하다는 것을
그렇다고 모든 낯섦이 익숙함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가까워지지 않는 관계도 있다.
애써 정을 붙이려 할수록 멀어지는 사이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낯선 것들을 무조건 피하고 싶지는 않아 졌다.
서툰 시작 끝에 피어나는 인연도 있는 거니까.
일은 익숙해질수록 쉬워지고 편해지지만, 사람은 익숙해질수록 복잡해진다.
처음엔 몰랐던 상처와 결, 다른 가치관과 감정의 결이 보인다.
그래서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고, 더 따뜻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 속도를 내고, 낯선 것에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진짜 관계가 만들어진다.
빠르다고 좋은 것이 아니며, 느리다고 꼭 틀린 것만도 아니다.
익숙한 사람에게는 편안함을 배우고, 낯선 사람에게는 마음을 다듬는 법을 배운다.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조금 더 넓고 깊은 관계를 배운다.
오늘도 조용한 사무실 안은 익숙한 키보드 소리가 울린다.
그 속에서 나는 새로운 관계의 느린 걸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속삭이듯 혼잣말을 한다.
"모든 것은 한때 낯설었다.
그러니 조금 어색하다고, 아직 잘 모르겠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오늘의 낯섦이 내일의 익숙함이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