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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틈새 12화

빌런과 나 사이에

by 담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책임을 미루고,

때로는 속이 터질 듯 굼뜬 태도로

함께 일하는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흔히 말한다.

"저 사람 정말 이상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리고 마음속에 '빌런'이라는 이름표를 그 사람의 얼굴에 붙여둔다.


다른 현장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생이 매일 하소연을 한다.

"언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보고서가 왔으면 확인하고 피드백을 줘야 하는 거잖아요.

수정할 부분 있으면 시공사에 말하고. 정리도 해놓고요. 그런데 문서가 왔는지도 어쩐지도 모르겠어요."


카톡너머로도 날 선 한숨이 느껴졌다.


동생은 일에 있어 분명하고 정확하고 부지런하다.

공문이 접수되면 곧바로 열어 확인하고, 수정사항은 바로 전달하며 누구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문서를 정리 놓는다. 그렇게 하면 실수는 줄고, 업무협조도 수월해진다. 어쩌면 함께 일하는 사무실에서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동생이 말하는 그분은 그렇지 않다.

보고서가 올라와도 확인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식 발주처에 제출해야 하는 월간 보고서는 항상 기한을 넘겨 완성되곤 한다.

무엇보다 동생을 답답하게 하는 건, 무엇을 물어도 답이 없거나, 애매하고 모호한 말로 넘겨버린다는 점이다.


"이거 어떻게 됐어요?"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못하니까 물어본 건데, 이런 식의 반응이 반복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답답해진다고 한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너무 답답해."

동생의 마음은 자꾸만 묵직해지고, 답이 없는 관계 속에서 지쳐갔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한참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가 빌런이 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를 수도 있다는 걸.

혹은, 다른 곳에서는 그가 따뜻하고 여유로운 사람으로 불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나'를 빗대어 타인을 판단한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그가 가볍게 여기면,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여긴다.

내가 성실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행동은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진 기준이라는 틀에 맞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느림은 나에겐 답답함이지만 누군가에겐 여유로움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의 말없는 태도가 나에겐 무관심처럼 느껴지지 다른 누군가에겐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배려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결국, '빌런'은 언제나 상대적인 존재다.

나와 안 맞는 사람일 뿐, 세상 모든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명확하고 빠르게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의 이런 방식이 인간미 없고 융통성 없다고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깊은 상처였을 수도 있다.

나는 단지 내가 편한 방식대로 했을 뿐이었지만,

그 모습에 실망하고 서서히 멀어진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누구나의 '빌런'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가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올 때마다

조금 멈춰 서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저 사람도 어딘가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일지도 몰라."

이 생각 하나로 조금은 덜 단정하게 되고, 조금은 덜 성급하게 타인을 판단하게 된다.


물론, 모든 관계가 이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속 부딪히고, 계속 불편하고,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빌런'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사람은 제각각 다른 모습과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

어떤 이는 빠르게 정리하고, 어떤 이는 천천히 되뇌며 정돈한다.

어떤 이는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오랫동안 생각을 굴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 다름이 때로는 불편함이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다름 덕분에 세상은 톱니같이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비추어 타인을 본다.

그리고 다시, 타인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본다.


동생은 오늘도 그 분과 마주하며 답답함 속에서 하루를 견딜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이 시절을 떠올리며 말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정말 나랑 안 맞았어."

그러나 그 시간이 있었기에, 더 좋은 동료를 만났을 때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 모든 관계를 감싸 안을 수는 없겠지만

거리를 두는 일과 미워하는 일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그 사람 또한,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생각 하나로 세상이 조금 덜 거칠어지고, 내 마음은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 시선을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대신,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조금 더 부드럽게 바라보려는 나의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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