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아팠다. 그런데 나는 내가 아픈지 몰랐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한번도 지각이나 결근을 한적도 없었고, 웃을일이 없어도 웃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 날에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척,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며 살았다.
감정은 꾹꾹 눌러 담았다.
보이지 않으면 내가 아프다고 느끼지 않으면,
아픈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날 아침, 거울을 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팔이며 목덜미, 손등까지 불게 번진 자국.
마치 모기에 물린듯 툭툭 불어난 발진.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약국에서 약을 사먹으면 괜찮아지겠지.
잠깐 스쳐가는 알레르기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볼때마다 그 붉은 흔적을 확인하게 되었다.
밤이면 더 심해졌다.
가려움이 잠을 깨웠고, 피부는 민감해지고, 하루의 리듬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팔을 긁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젠 약국의 약으로도 진정되지 않았다.
더이상 참기 어려울때 병원을 찾았다.
알레르기 검사를 받았다.
5만원이 아까워 미루고 미뤘는데, 원인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원인을 찾아야 대처라도 할것 같아서요. 이렇게 가려워서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결과가 나오려면 2~3일이 걸린다고 했다.
조바심과 궁금증으로 기다리다 받아든 결과지는 참담했다.
양성 항목 하나 없이 모두 음성.
내 5만원을 투자해서 받은 결과는 결국 원인불명이었다.
나는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요즘 원인을 알수 없는 두드러기가 많아요. 스트레스나 화학물질이 원인일수도 있으니 체크해보세요.
약을 5일치 드릴테니 복용하고 경과를 지켜보시죠."
나는 패닉에 빠졌다.
나의 일상생활이 무너지고 있는데, 결국 내가 할수 있는건 약을 먹는 것 뿐이었다.
언제까지 계속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두드러기에게 "반려 두드러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었지만 함께 지낼 수 밖에 없으니까.
나와 삶을 공유하게 된, 조용한 동거인.
이 존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옷을 입을때도 피부에 자극이 덜가는 옷으로 골라입고,
가방에는 약을 항상 챙겼다.
음식 하나를 먹을때도 '혹시 이건 괜찮으려나?"하고 의심했다.
누군가를 만날 때도 마음 한구석이 긴장됐다.
대화 도중에도 가려움이 올라오면, 슬쩍 손등을 긁으며 표정을 숨겼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이건 단순한 피부의 반응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안의 감정이 보내는 신호일지도.
"괜찮은 척하지마.
그냥 피곤해서 그런거라고 넘기지마.
지금, 너 꽤 많이 아파"
내가 감춰어둔 말들, 외면했던 감정들,
참고 참아온 스트레스와 눌러온 눈물이
결국 피부를 타고 밖으로 흘러나온 건 아닐까.
몸이 나보다 먼저 나의 아픔을 알아챈 건 아닐까.
이 작은 고통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엇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두드러기는 괜히 귀찮은 증상이 아니었다.
"나를 살리기 위한 몸의 작고도 정직한 구조요청이었다.
누군가를 말할것이다.
"고작 별거아닌 두드러기 하나로 호들갑이야?"
맞다. 고작 하나.
하지만 삶을 무너뜨리는 건 언제나 그'고작'로 시작된다.
고작 한 마디 말,
고작 한 번의 외면,
고작 한 방울의 무시.
그 고작이 사람을 아프게 만든다.
이제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본다.
붉은 흔적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내게 묻는다.
"오늘은 좀 어떠니?"
"오늘은 어디가 불편하니?"
그리고 내게 말해준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쉬어도 돼"
반려란, 끝까지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두드러기는 내 하루를 망치기도 했지만, 또한 내 삶을 돌아보게 해 준 존재였다.
완전히 나아져야겠지만, 나아질때까지
이 반려두드러기와 함께 살아가며
내몸을 내마음을 그리고 내 하루를 조금 더 소중하게 살게 되었다.
이제는 가려움이 찾아올때마다
내가 나를 더 돌보아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게된다.
나는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나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