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늦었다.
하루의 피로가 몸을 타고 천천히 내려앉는 시간.
겨울이 막 시작된 찬 바람이 뺨을 스치고, 인적 드문 골목에는 바스락 거리는 낙엽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날도 바쁜 하루를 마치고, 무심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길.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길가에 놓인 불 밝힌 파란 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전등 아래, 연신 손을 움직이며 호떡을 굽고 할머니가 계셨다.
얼굴은 지쳐 보였지만, 두 손은 익숙한 리듬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요즘 이 시간에 웬 호떡이지?'
잠시 멈춰 선 발걸음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함께 따라나섰다.
호떡이라니,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가.
어릴 적 학교 앞에서 종종 사 먹던 그 호떡. 달콤한 설탕과 견과류가 버무려진 속이 지글지글 익어가며 퍼지던 그 향기. 기억의 문이 열리고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나도 모르게 다가가 "호떡 하나 주세요."하고 주문했다.
"응, 하나지?"
할머니가 미소를 띠며 주름진 손으로 반죽을 떼어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철판 위에 올리셨다.
치익ㅡ. 하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깨우듯 퍼졌다.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이 데워졌다.
호떡 하나에 2,000원.
'예전엔 천 원에 3개씩 했는데...'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곧 사라졌다.
맛있을 거라는 기대가 그 모든 생각을 덮었다.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과 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친근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시간에 저렇게 반죽이 많이 남아서 어쩐대요. 언제 다 팔고 간데요."
그 말속에는 할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나도 고개를 돌려 반죽통을 바라보았다.
정말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오늘 호떡이 많이 팔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날은 춥고, 시간이 늦었으니 손님이 많을리 없었다.
그 순간 마음 한켠이 아릿했다.
그 반죽은 단순한 밀가루 덩어리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아침부터 준비했을 하루치의 희망,
추위와 피곤을 견디며 버틴 인내,
그리고 팔지 못한 만큼의 실망,
오늘 하루의 생계,
그 모든 게 한 통 가득 들어 있었다.
그건 하루치의 '마음'이었다.
그때, 갓 구운 호떡이 종이컵에 담겨 건네졌다.
아주머니는 받은 호떡을 학생에게 조심스레 내밀며 말했다.
"지금 먹으면 너무 뜨거우니까, 식혀서 먹어야 돼"
그 말에 아이는 조심스럽게 받았다.
말투와 몸짓이 조금 느린 걸 보니, 장애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눈은 맑았고, 미소는 따뜻했다.
아주머니도 아이도 호떡 하나에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며 삶의 고단함을 견디는 아주머니.
그런 와중에도 추운 밤늦게까지 장사를 하는 할머니를 걱정하고,
무심코 뜨거운 호떡에 아이가 데일까 먼저 챙기는 그 마음.
그 안에는 어떤 가식도, 위선도 없었다.
그저 다정함. 진심. 그리고 사랑만이 있었다.
그 순간, 추운 골목 한켠에서 내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는 단지 호떡을 먹으러 온 행인이었지만, 그곳엔 각자의 하루가, 인생이 겹쳐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추운 계절을 잊게 하는 호떡을 굽고 있었고,
누군가는 자식을 향한 애틋함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었고,
누군가는 낯선 풍경 앞에서 고단한 하루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손길들,
묵묵히 살아낸 하루의 숨결들,
사소하지만 따뜻한 눈빛 하나,
그것들이 오늘을 버티게 해주는 이유가 된다.
사람은 거창한 말에서 위로받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소한 순간들,
이런 다정한 마음들이
굳어 있던 마음을 천천히 풀어준다.
"호떡 4개 더 포장해 주세요."
할머니의 반죽을 덜어내주고 싶어 호떡을 더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봉지 속 호떡은 따뜻했고, 마음은 더 뜨거워졌다.
나는 호떡을 샀지만, 사실은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은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는 일이 아닐까.
누군가의 걱정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고,
누군가의 친절이 또 다른 이의 손을 움직이며,
그렇게 이어진 따뜻함이
조금씩,
이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
살아간다는 건,
서로를 데우는 일이다.
그 온기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되돌아온다.
그날 밤 내가 산건 호떡 다섯 개였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큰걸 받았다.
걱정해 주는 마음, 나누는 손길, 사랑이 담긴 눈빛 그리고 사람의 체온이었다.
오늘도 어딘가 그 골목 어귀에서 호떡을 굽는 할머니가 계실 것이다.
활짝 웃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한 아주머니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은 보이지 않은 따뜻함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작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 온기 하나하나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