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마음에 밤송이를 올려놓은 듯 마음이 온통 따끔따끔하다.
친구 J를 하늘나라로 보낸 후 계속 그렇다.
J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였다.
그 시절 J는 나와 달리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걸 보면서 부러울 때가 많았다.
자신감 있는 모습에 가정환경도 좋아 보였다.
J가 웃을 때는 가늘게 눈웃음을 치는 얼굴은 온 세상이 환해 보였다.
나는 그런 J가 부러웠었다.
우리는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J가 나를 찾아냈다.
J는 예전처럼 참 따스한 사람이었다.
표현에 서툴고 답답한 나였지만, H와 J는 알뜰히 챙겨주었다.
우리는 단톡방을 만들어 시댁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철 지난 농담까지 나누서 서로를 의지했다.
마치 오래된 이불처럼, 낡았지만 따뜻한 우정이었다.
하지만, J는 유난히 힘든 시댁을 만나 우울증 약을 안 먹는 날이 없었다.
마음을 짓누르는 말, 가혹한 시선, 끝없는 요구들이 J의 하루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H는 따뜻한 성정이어서 늘 J를 다독였고, 나는 더 힘내라고 충고했다.
어느 날 J가 말했다.
"나 살고 싶지가 않아."
그리고 이어진 말.
"쥐약을 샀어"
그 순간, 내 머릿속이 텅 비었다.
나는 다그쳤다.
"그거 버려. 그걸로는 안 죽어. 고통스럽기만 하지."
H는 J의 힘든 마음을 다정하게 다독여주었었다.
늘 힘든 친구를 감싸주고 싶었지만 말이 모질게 나가고 말았다.
J의 절망을 이해하면서도, 그 마음이 두려웠다.
나도 삶을 놓아버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
푸른 절망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던 날들.
그런데 삶은 끝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아 이렇게 살게 되었다.
죽고 싶다는 마음조차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는 순간이 온다는 걸, 나는 몸으로 겪었다.
그래서 J에게 차갑게 말했던 걸까?
그 절벽 끝을 너무 잘 알아서,
그 위에 서 있는 J를 보는 게 너무 무서워서.
아니면 그때의 나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하지만 J도 두 아이의 엄마다.
늘 밝던 J가 약해진 모습을 보니,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약해지면 안 된다고, 예전의 밝은 J를 다시 보고 싶다고,
그 마음이 뒤섞여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했다.
J가 별이 되기 나흘 전.
"나 숨이 너무 차. 한 달 전쯤부터 그랬는데......... 천식인가 봐."
H는 천식전문 호흡기내과를 알아봐 주고 얼른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고, 나는 들어보니 천식이 아니라 공황장애인 것 같아 정신과에 가보라고 했다.
호흡기 내과에 다녀온 친구는 천식은 아니고 역류성식도염진단을 받고 약을 받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호전되지 않았다.
나는 친한 언니가 공황장애가 왔을 때 증상이랑 비슷한 것 같아 정신과에도 가보라고 했다.
J는 정신과에도 가보았다.
공황장애가 맞다며 약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출근 후 J가 약을 먹고 좋아졌는지 궁금했다
"J야 오늘은 좀 어때? 약 먹으니까 괜찮은 것 같아?"
한 시간쯤 흘렀을까 일을 한창 바쁘게 처리하고 있었는데 H에게 전화가 왔다.
"야, 카톡 봤어?" 어떡해?!! "
"응? 무슨 카톡? 나 바빠서 못 봤는데?"
"지금 카톡바바 어떻게 해? 어?"
비명에 가까운 울먹이는 목소리.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단톡방을 열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나 J언니야"와 함께 J의 부고장이었다.
순간, 세상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바람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설마...
설마 스스로 떠난 건 아니겠지?
그 절망의 끝을 나는 너무 잘 알아서,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공황장애까지 왔다며 우울해하던 J가 잘못된 선택을 한건 아닌지 무서워졌다.
일을 마치고 H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정말로 J의 빈소가 차려져 있었고, 영정사진 속 J는 중학교 때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웃음 하나로 세상을 밝혔던 그때의 J로.
J의 언니말에 따르면 J는 지난밤 호흡이 가빠 응급실에 왔고, 괜찮아져서 일반병실로 옮겨 처치를 하던 중 심장마비가 왔다고 했다.
삶이 그렇게, J의 생을 한순간에 가져가버렸다.
H는 울었고, 나도 울었다.
정신과에 가라고 말했던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종합병원에 가라고 할걸.
심장검사를 받으라고 할걸......................
그 후로 내내 그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종합병원에 가라고 했다면 J는 아직 살아있을까?
나만 아니였다면….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는다.
온몸이 바스스 부서져 바람에 사라질 것 같다.
정신을 꼭 잡고 있어야 한다.
한번 놓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정신을 잡아야한다.
늘 모지란 나를 늘 사랑해 주던 친구.
온 마음으로 응원해 주던 친구.
그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바늘이 되어 매일 마음을 찌른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전시회를 열었다.
평소 같았으면 가장 먼저 달려와 꽃다발을 안겨주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 J는 없었다.
그 사실이 어딘가 쓸쓸하고 외로웠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잃는다는 건 무엇일까?
남겨진 사람의 슬픔은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람은 누군가 만나고 헤어지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상처받고 다시 살아간다.
헤어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법은 없다.
다만 익숙한 척하며 꾸역꾸역 버틸 뿐이다.
보고 싶을 때 마음이 울컥 여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