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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틈새 19화

선물 보다 믿음

by 담은

날이 좋던 일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제법 따뜻했다.

초겨울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아이들 웃음은 마치 봄처럼 맑고 따사로웠다.


차 안에서 누나랑 놀던 막내가 장난을 멈추고 말했다.


"엄마, 나 장간감 가게 가서 장난감 하나만 사줘"

"어떤 장난감이 갖고 싶은데?

근데 이제 곧 크리스마스잖아.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실텐데?

우리 조금만 기다려보자."


그 말에 아이의 얼굴에 그늘이 지어졌다.

굳은 얼굴에 반짝 눈물이 맺혔다.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산타할아버지가 나는 선물 안 주실 거야."

"왜?"

"산타할아버지는 착한 애들만 선물 주잖아."


그 순간, 잠시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막내가 귀여우면서도 가슴 한가운데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줄이야.

아이는 마치 자신을 벌주는 재판관처럼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었다.

여섯 살짜리의 아이의 입에서 그런 후회와 낙담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곁에 있던 큰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술 더 떠 말했다.

"윤이 큰일 났다. 나쁜 애는 선물만 못 받는 게 아니야. 나쁜 애들은 크리스마스에 크람푸스가 와서 잡아간대."

큰아이는 막내의 반응이 재미있어 작정하고 놀렸다.

순간, 막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곧 그 눈이 빨개지더니 말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 나......... 잡혀가는 거야?"

막내의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금세 울음을 터트렸다.

온 세상의 설움을 다 가진 듯 온몸을 떨며 흐느꼈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고 두 손을 꼭 쥔 채 몸을 웅크렸다.


나는 당황해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작고 여린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말했다.


"누나가 윤이가 귀여워서 장난친 거야. 우리 윤이는 절대 나쁜 애가 아니야.

엄마한테는 엄청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야. 산타할아버지도 지금 너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고 계실 거야.

지금부터 착한 일을 더 많이 하면, 꼭 멋진 선물을 받게 될 거야."

"진짜? 그럼 나 안 잡혀가?"

"당연하지. 엄마가 있는데 윤이를 어떻게 잡아가?"


아이의 울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누나를 쏘아보며 나를 꼭 안았다.

나는 그 작고 어린 몸을 품에 안고, 아이의 믿음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 작은 아이는 아직도 산타를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존재하는 누군가를 믿는다.

그 믿음이 너무 순수해서,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 깊은 곳이 찡해졌다.


윤이는 우리 집의 대장이었다.

늘 "내가 형도 이겨. 내가 대장이야."를 외치며 씩씩하게 나섰다.

누나랑 게임을 해도 이겨야 하고 형아랑 레슬링을 해도 이겨야 되는 아이.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커다란 형과 누나 사이에서 작지만 강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려 안간힘을 쓰던 아이.


그런 아이가 오늘은 무너졌다.

믿고 있는 세계가 흔들리듯, 자기 존재마저 위협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산타가 선물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자기는 '착한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자책.


어쩌면 그건 산타 이야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착한 아이일까?"라는 물음.

그 질문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결과였다.

어른들의 눈에 사소한 일 하나가, 아이에겐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말도 잘하고 얄미운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며, 벌써 다 큰 줄로 착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도 밤마다 꼭 안겨야 잠들고, 내가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여린 존재였다.


그날 밤 아이는 내 옆에서 누워 조용히 물었다.

"엄마, 나 진짜 착한 아이야?"

나는 팔을 뻗어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따뜻해지는 체온이 전해졌다.

"그럼, 넌 엄마 보물 중에 제일 빛나는 보물이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착한 아이야."

그러자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럼 착한 일을 더 많이 해서 산타할아버지 선물 받을래."


그 말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믿음이, 아이의 순수함이, 이 계절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겨울은 차갑지만,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따뜻하게 변해간다.


산타를 믿는 아이는 결국, 사랑을 믿는 아이다.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 그래서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사랑을 증명해 줄 선물.


그 선물이 꼭 장난감일 필요는 없다.

한 번 더 안아주고,

눈 마주치고,

"너는 정말 소중해"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고, 우리 어른들에게는 지난가 버린 유년의 산타일지도 모른다.


겨울밤, 날은 첨첨 더 차가워지고 있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잠든다.

그 마음이 너무 사랑스러워 오늘따라 나도 산타를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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