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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날의 끝에서

by 담은

나의 하루는 지루함 투성이다.

매일 아침 6시에 눈을 뜨고,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을 보낼 준비를 한다.

출근길엔 도로에 꽉 들어찬 차들 사이에 끼어 출근을 한다.

회사에 도착하면 같은 사람들과 아침인사를 나누고, 컴퓨터를 켜고 하루를 시작한다.


사람과 일, 일과 사람 사이에서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어느새 퇴근시간.

다시 컴퓨터를 끄고, 다시 꽉 막힌 차들 사이에 갇혀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 밥을 챙기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이것저것을 하다 보면 벌써 자정을 앞둔 시간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끝난다.


매일 똑같은 하루.

같은 길, 같은 대화, 같은 고민

반복되는 날들이 점점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삶이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도 많이 써봤다.

그렇지만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해

어느 순간부터 '이게 사는 건가?' 하는 의문에 휩싸이곤 했다.

간절히 기다리던 특별한 순간들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삶은 지독히도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기억할 만한 사건도, 눈에 띄는 변화도 없이

그저 오늘도 어제처럼, 그렇게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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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직장을 수없이 옮기기도 하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며 변화를 줘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일상이 되면 결국 같은 지루함이 따라왔다.

나는 다시 초조해졌고, 또 다른 '탈출구'를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 삶의 뒤안길에서 나를 되돌아보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지루하다고 부정했던 이 날들이 사실은 나의 인생 대부분이라는 것을.

특별하지 않은 날들, 반복되는 시간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들이

비로소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그 평범한 날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인정하기 싫었다.

지루한 것들이 모여 나를 만든다고?

나는 나의 인생이 좀 더 행복하고 기쁜 일이 많았으면 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던 사실은

내 삶의 대부분을 채운 것은 매일 아침 느끼던 햇살,

같은 자리에서 반복되던 루틴,

아이들의 매일 조그씩 달라지는 표정,

그런 작고 평범한 것들이었다.


늘 그 자리에서 반복되는 것들이 나를 조금씩 키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엔 서툴렀던 일도 익숙해지고 조금씩 잘하게 되면서

나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매일의 지루함과 무료함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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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무심코 흘려보내던 하루에도 미묘한 차이를 느꼈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의 맛이 어제와 미세하게 달랐고,

하늘의 얼굴도 매일 조금씩 달랐다.

바람의 온도, 아이들의 눈빛,

그 모든 것이 날마다 조금씩 다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작은 차이들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지루함이 내게 가르쳐준 건 '견디는 힘'이었다.

화려한 자극 없이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힘.

평범한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끈기.

그것은 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었다.


나는 이제 지루함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지루한 날 들 속에서 반짝임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다이어리를 쓰고, 독서모임을 만들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대화 속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훌쩍 커버리기 전에 함께 기억할 만한 추억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그 순간부터 무료한 일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루함 속에서 찾아낸 반짝임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평범한 날들은 더 이상 지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 숨어있는 작고 빛나는 것들을 찾는 일이

내 삶의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삶을 이루는 것은 일상 속 숨어있는

작은 순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지루한 날들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공존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무료한 일상 속에서도 나는 더 이상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오히려 나를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나는 일상의 지루함을 깊이 사랑한다.

매일 같은 길을 걷지만 그 속에서 오늘의 햇살을 느끼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다독인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인생의 대부분은 특별하지 않은 날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무료한 날들이 쌓여,

어느 날 문득 가장 나다운 나를 만들어 낼 테니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기꺼이

지루한 날들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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