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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게 많다는 건

by moviesa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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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시간이었다.

늘 조용하던 교실이 이상하게 활기가 돌았다. 평소엔 귀신같이 잠을 자던 맨 뒷줄 학생마저 고개를 들었다. 교과서보다 눈빛이 더 반짝였다. 시험 범위 발표할 때보다 집중력이 높았다. 인간의 본능이란 참 정직하다.

"선생님, 근데요—"

그 한마디로 시작된 질의응답 릴레이. 손은 번쩍, 얼굴은 상기,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어떤 아이는 질문하기 전부터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한 척하려다 실패한 얼굴들. 그 모든 게 귀여웠다.

"그럼 사랑은 꼭 결혼해야 하는 거예요?"

첫 질문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교과서엔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이의 눈빛이 생각보다 깊었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미 고민해본 질문이었다. 부모님이 싸우는 걸 봤거나, 드라마에서 이별 장면을 봤거나, 혹은 자기 나름의 작은 상처가 있거나.


"왜 남자는 변성기가 있고 여자는 없어요?"

이번엔 옆자리에서 손이 올라왔다. 생물학적 질문 같지만, 그 안에는 '왜 나만 이렇게 변하지?'라는 불안이 숨어 있었다. 변화는 언제나 두려움과 함께 온다. 특히 내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할 때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최근 들어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기가 생기는 건 진짜 신기해요. 과학인가요, 사랑인가요?"

이 질문엔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 "둘 다요!"라고 외쳤다. 또 누군가는 "과학이 먼저 아니에요?"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교실이 순식간에 토론장이 됐다. 나는 그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이 아이들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큰 질문과 씨름하고 있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나는 순간, 교과서 문단 사이에 갇혀 있던 단어들이 현실로 걸어 나오는 걸 봤다. '생식', '호르몬', '2차 성징' 같은 딱딱한 용어들이 아이들의 입을 통과하면서 살아 움직였다. 그건 더 이상 시험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구는 얼굴이 붉고, 누구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아이는 친구 어깨에 얼굴을 묻었고, 어떤 아이는 창밖을 보는 척했다. 그런데 그 모든 장면이 참 사랑스러웠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궁금해하는 것도, 진지한 척하다가 웃음 터뜨리는 것도. 전부 성장의 한 페이지였다.

"선생님은 처음 알았을 때 어땠어요?"

갑자기 누군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이들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선생님도 한때는 궁금했을까. 선생님도 부끄러웠을까. 선생님도 우리처럼 어색했을까.

"많이 부끄러웠어. 그리고 아무도 제대로 안 가르쳐줘서 혼자 엄청 궁금했지."

내 대답에 아이들이 웃었다. 조금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도 우리랑 똑같았구나. 그럼 우리도 괜찮은 거구나.

이토록 진지하게, 이토록 솔직하게 묻는 눈빛들. 그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려는 첫 걸음'이었다. 누군가는 자기 몸이 왜 이렇게 변하는지 알고 싶었고, 누군가는 이 낯선 감정의 정체가 뭔지 궁금했고, 누군가는 그저 나도 정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수업 중간,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이런 거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요?"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맞다.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까. 부모님께 묻기엔 어색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기엔 확신이 없고, 인터넷엔 이상한 정보가 너무 많고. 그 사이에서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선생님이 있는 거야. 그리고 너희가 궁금한 거 묻는 거고."

그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우르르 나간 뒤 나는 한동안 칠판을 바라봤다. 칠판엔 엉성한 그림과 화살표, 낯간지러운 단어들이 남아 있었다. 오늘 수업 주제보다 훨씬 큰 걸 배운 것 같았다.

복도에서 누군가 "야, 오늘 수업 진짜 재밌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목소리가 "근데 나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하고 답했다. 그 대화가 멀어지면서, 나는 웃음이 났다.


괜찮아. 모르는 게 당연해. 어른인 나도 아직 모르는 게 많은걸.

중요한 건, 묻는 걸 멈추지 않는 거다.

궁금한 게 많다는 건, 아직 세상과 대화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질문이 있다는 건 답을 찾으려 한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 모든 질문 속에, 조금씩 자라나는 자기 자신이 있으니까.


다음 시간, 아이들은 또 무얼 물어올까. 나는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 진지하고,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질문들을.

그 질문들이 언젠가 아이들 스스로를 지켜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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