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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숨 넘어가네

by moviesa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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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복도 끝에서 정체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피리인가, 휘파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비명인가. 내일 단소 시험을 앞둔 아이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음악실 문을 열자 아수라장이었다. 한 아이는 창문에 기대어 후—후— 숨을 내쉬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단소를 거꾸로 들고 있었다. "이렇게 불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건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구석에서는 두 아이가 서로의 단소를 바꿔 불어보고 있었다. "야, 내 거로 해봐. 내 건 원래 안 돼."


기타는 참 착하다. 잡자마자 띵가띵가 즐겁게 울어준다. 실수로 집어 들어도, 아무렇게나 튕겨도, 일단 소리는 난다. 코드를 틀려도 그게 그거 같은 소리가 나준다. 하지만 단소는 다르다. 입술을 갖다 대는 순간 푹—! 하고 죽어버린다. 마치 "너랑은 안 해"라고 선언하듯. 호흡도 각도도 힘도 다 맞아떨어져야만 겨우 삐—하는 소리가 난다. 그것도 자기 마음 내킬 때만.


"선생님, 이거 불면 안 돼요!"


얼굴이 시뻘개진 한 아이가 항의조로 말했다. 단소를 불겠다는 게 아니라, 단소를 원망하는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 5분을 불었는데 단 한 번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옆에서는 또 다른 아이가 중얼거렸다.


"야, 너는 왜 소리가 안 나냐?" "몰라. 단소가 나랑 사이가 안 좋아."


이쯤 되면 악기가 아니라 짝꿍이다. 맞는 애는 하루 만에 아리랑을 술술 뽑아내는데, 안 맞는 애는 끝내 한 음도 못 낸다. 같은 플라스틱 관인데, 누구한테는 악기고 누구한테는 그냥 막대기다. 세상의 불공평이 이렇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도 드물다.


교실 바닥에서는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북처럼 울렸다. 누군가는 단소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입김을 호호 불어 따뜻하게 만들어보기도 했다. "혹시 온도 문제인가?" 아니, 그것도 아닐 것 같은데. 한 아이는 단소 구멍을 하나씩 막아보며 실험 중이었다. "이 구멍이 막힌 건가?" 옆에서 친구가 말했다. "야, 그거 원래 뚫려 있는 거야."


음악 선생님은 교탁에 기대어 태연하게 말했다. "연습하면 돼." 하지만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어떤 건 연습으로 되고, 어떤 건 연습으로도 안 된다는 걸. 단소는 명백히 후자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또다시 입술을 갖다 댔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핵노잼"이라 욕하면서도, 내일 시험은 버텨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재밌든 지루하든, 아리랑은 결국 불려야 하는 법이니까. 시험지에는 "아리랑 연주하기 (20점)"라고 적혀 있을 테니까.


가끔 기적처럼 소리가 났다. 그러면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 어?"를 연발했다. 하지만 다시 불면 또 안 났다. 단소는 그런 식이었다. 희망을 주었다가 빼앗아가는 잔인한 악기. 한 아이가 절규했다. "아까는 됐는데!"


나는 교실 뒤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인생이 꼭 단소 같을 때가 있다. 재미는 없는데, 그래도 불어야 하는 순간. 소리가 안 나도 계속 입을 갖다 대야 하는 시간. 누군가는 한 번에 척척 해내는데, 나만 발을 동동 구르는 날들. 아이들은 지금 그 연습을 하고 있는 거였다. 불공평하고,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것들 말이다.


숨은 가쁘지만, 언젠가 이 순간도 음악처럼 흘러가겠지.


한 아이가 드디어 '솔' 음을 냈다. 아리랑의 첫 음이었다. 주변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야, 됐어!" 그 아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웃었다. 다시 불었더니 또 나왔다. 이번엔 확실히 '솔'이었다. 교실에 작은 환호성이 퍼졌다. 단소와 화해한 첫 번째 아이였다.


내일 시험이 끝나면 아이들은 단소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을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문득 그때를 떠올리며 웃을 것이다. "그래, 나 단소랑 사이 안 좋았지." 그때는 알 것이다. 단소가 미워서가 아니라, 잘 안 돼서 답답했던 그 마음이 사실은 무언가를 간절히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는 걸. 소리 한 번 내보려고 얼굴 빨개지며 애썼던 그 순간이, 알고 보면 꽤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는 걸.


복도에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소리.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그 안에 아리랑의 멜로디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서툴고 불완전하지만, 분명 아리랑이었다.


그 소리가 언젠가 음악이 될 거라는 걸, 아직 아이들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저렇게 또 단소를 입에 가져다 대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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