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들은 시간표보다 계절을 먼저 본다

설렘을 잃었던 어른에게 겨울은 가끔 말을 건다

by moviesamm
MOVIESSAM.png


밤사이 조용히 내린 눈은
학교에 오자마자 아이들 마음을 먼저 깨웠다.
첫 교시 종이 울리기도 전부터
엉덩이가 들썩들썩, 의자는 그저 잠시 앉아 있을 곳일 뿐이었다.

“선생님, 눈 왔어요. 나가면 안 돼요?”
“1교시에 나가면 안 돼요?”
“그럼… 점심시간에는요?”

이미 열 명째다.
대답은 똑같은데 표정은 매번 새롭다.
아이들은 마치 ‘혹시 이번에는 허락해줄지도 몰라’ 하는 마음으로
매번 처음 듣는 질문처럼 묻는다.

시간표엔 국어, 수학, 사회가 적혀 있지만
아이들의 마음엔 이미 ‘1교시: 눈사람 만들기’가 적혀 있었다.
하얀 운동장 앞에서
배움보다 먼저 도착하는 설렘을
어른의 기준으로 막을 수 있을까.


점심시간이 되면 나가도 되냐는 질문이
줄어들지 않는 걸 보면
아이는 계절을 배우고,
어른은 마음을 배우는 것 같다.


그치만…
문제는 이미 행정실에서 아이들 안전을 위해
염화칼슘을 잔뜩 뿌려놨다는 사실이었다.

운동장 절반은 하얗게 눈이 쌓였고,
나머지 절반은 하얗게 녹아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둘 다 눈이지만
어른에게는 한쪽이 기쁨이고,
다른 한쪽은 민원이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얘들아… 사실 너희는 오늘 못 나간단다.”
그 말을 꺼내면
분명 체육대회 뺨치는 항의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쩍 말을 돌렸다.
“어… 1교시는 실내에서 해야 하는 게 있어서…”
“그럼 2교시는요?”
“2교시는 준비물이 있고…”
“그럼 점심시간은요?”

열두 번째 질문쯤 되니까
아이들의 표정은 점점
‘선생님, 뭔가 숨기고 있죠?’
하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맞다. 숨기고 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다.
행정실의 염화칼슘이
이미 너희의 설렘을 반쯤 녹여버렸다는 사실을
어찌 꺼내겠니.


더 웃긴 건,
나는 오늘 아침
‘그래, 1교시에 한번 나가볼까?’
하는 교사답지 않은 상상을 했던 사람이다.
작은 눈사람 하나라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들만 들뜬 게 아니라
나도 은근 들떠 있었다는 걸
애써 감추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른의 겨울은
언제나 책임이 먼저 오고
설렘은 그 뒤에 슬그머니 따라온다.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얘들아, 오늘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

아이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믿기 싫었던 거겠지.
첫눈이 온 날,
세상에서 제일 슬픈 표정은
탕후루를 못 먹는 아이의 표정이 아니라
눈이 와도 운동장에 못 나가는
초등학생의 표정이다.


아이들 얼굴이 쭈욱 길어지는 걸 보며
나도 속으로 함께 찡했다.

첫눈이 오면 아이들은 시간표를 잊고 뛰고,
어른은 마음속 계산기부터 켠다.
하지만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남겨진다.


아이들처럼 설레고,
나는 어른처럼 걱정하고.

그래서 첫눈 오는 날마다
매번 같은 결론에 도착한다.

아이들은 겨울을 배우고,
어른은 그 아이들을 보며
잃어버린 겨울을 다시 떠올린다.

keyword
화, 금 연재
이전 10화식판 위의 마음들은 언제나 솔직하다